백수(白手)란, 손으로 하얀 도화지를 무궁무진하게 꾸밀 수 있는 자
백수가 되었다. 몇 년 주기로 한 번씩 찾아오는 이 직업이 나의 천직인 것 같다. 일이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반복될수록 마녀가 굽는 쿠키들처럼 혹은 기계처럼 움직일 뿐이었고, 시시콜콜한 얘기들이 박쥐의 날개를 달아 이리저리 옮겨 다닐수록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있었다. 대우도 점차 변해갔다. 직장인이라면, 남의 돈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겪는 혹은 이겨내야 하는 단계라고 하지만, 회사를 옮겨도 어찌 변하는 것이 없을까? 내가 변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하루의 반을 넘기 시작했고, 연장 계약은 물 건너갔다. 아니 내가 차버렸다. 전 연인도 이렇게 시원하게 거절한 적이 없는데, 직장은 왜 이리 쉬운지, 아마 아쉬운 점들이 없거나 다음에 더 좋은 회사에 취직할 거라는 기대감과 자만감이 내 안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이는 새로운 취직자리를 알아보기엔 이미 신입사원이란 타이틀은 부끄러웠고, 물경력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동안 모았던 월급과 퇴직금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이 돈으로 또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회차의 백수는 좀 다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정말 이것저것 손만 대고 끝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항상 하고 싶은 일이나 취미는 많았지만, 그걸 이끌어 내는 건 어려웠고 또 두려웠다. 그마저도 실패하면 정말 태어난 김에 죽지 못해 사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 같았다.
백수가 되었지만, 마지못해 직장을 구하거나 억지로 사회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당당히 나를 소개하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백수였지만, 이제 당당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나를 뽐내기 위해 할 일들이 뒤죽박죽 엉켜있다. 오늘은 내가 그동안 무관심해서 묶여있던 실타래를 풀어본다. 한가닥 한가닥 손(手)으로 풀어 가지고 있는 색깔과 모양에 따라 하얀(白) 도화지 위에 멋진 그림을 그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