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Think 프로젝트 묵상에세이《그러므로 생각하라》
살면서 수많은 역설을 마주한다. 미리 준비한 일이 정작 필요할 때 무용지물이 되는 경험, 더 많이 가지려 할수록 허망함이 커지는 순간, 서두를수록 오히려 일이 늦어지는 아이러니. 나는 성격이 급하고,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이다. 반면 남편은 “미리 준비하면 체한다”는 태도로 살아간다. 처음에는 그런 그가 그저 담대한 사람 혹은 태평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함께 살아보니, 남편 역시 불안을 느낀다. 다만 그는 미리 서두를 때 오히려 불안을 더 크게 느꼈다. 부부로 살아간다는 건, 결국 서로에게 조금씩 맞춰가는 일이다. 나는 조금 느슨해졌고, 남편은 조금 조여졌다. 미리 서두른다고 일이 빨라지는 건 아니며, 그저 내 불안을 잠시 덜어줄 뿐이라는 사실을 일상의 경험을 통해 체득하게 되면서, 미리 준비하는 일을 줄일수록 불안도 줄었고, 이제는 미리 준비할 이유마저 사라졌다. 그저 내가 한 건 남편이라는 세계를 내 삶에 받아들이게 된 것일 뿐인데 말이다.
며칠 전, 엄마의 퇴임식이 있었다. 교직에서 41년 3개월을 보낸 엄마를 위해 가족끼리 조촐한 시간을 가졌다. 어떤 학생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엄마는 한 여학생의 이름을 말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아이였다. 그 이름이 단번에 기억났다. 엄마의 시에도 등장했던 이름이었다.
엄마에게 물었다. “성적이 우수했던 제자들도 많았을 텐데, 그런 아이들은 기억에 남지 않아요?”
엄마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런 애들은 자기가 잘난 줄 알지.”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친다. 하지만 정작 엄마는 선생님으로서 지혜로운 제자가 아니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여전히 고단하게 살아갈 한 명의 삶을 떠올렸다. 참 역설적인 일이다. 지혜가 필요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그런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지혜를 줄 수 있는 사람.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선생님의 역할이다.
얼마 전부터 G.K. 체스터턴의 정통, 이단, 영원한 인간을 읽고 있다. 19세기에 나온 책이지만, 최근 새로운 에디션이 출간되어 손에 들었다. 이 책들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역설’이다. 체스터턴은 기독교를 반박하려다가 오히려 기독교의 논리성을 발견했고, 무신론을 비판하려다 신앙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는 너무나 급진적이고 역설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이다.” 그가 정통에서 남긴 말이다.
그는 유물론자들이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는 지극히 협소하다고 지적한다. “그들의 우주는 못과 톱니바퀴까지 모두 완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세계보다 더 작다. 마치 미친 사람의 명료한 체계처럼 외부의 생명력을 전혀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성과 과학은 명료해지려 할수록 신비로워지고, 신비주의는 그 자체로 명확해진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역설로 가득하다. 마가복음 8장 35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하리라.”
이보다 더 강력한 역설이 있을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생명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희생을 통해 참된 생명을 얻는 길을 제시하신다. 세상은 성공과 자기보존을 가르치지만, 복음은 실패와 헌신을 통해 영원한 것을 얻는 법을 알려준다.
두려움을 피하려 할수록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상처받지 않으려 할수록 더욱 단단한 벽에 부딪힌다. 1년 째 하고 있는 폴댄스라는 운동을 할 때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높은 봉 위에서 떨어질까 봐 움츠러들면 동작이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정확한 동작을 하려면, 위험해 보이지만, 그걸 감수했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움직임이 나오고, 더 안전해진다.
체스터턴은 애초에 신앙을 변호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무신론을 비판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발견했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때로는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길이 열린다. 역설 속에 숨겨진 진리는, 우리가 모순이라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더 깊은 차원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본 글은 한소망교회 사순절 Think 프로젝트 《그러므로 생각하라》 묵상집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