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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고, 따라갈 수 없는

by 최서영

예수님이 변화된 모습을 보았을 때,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가끔 베드로 같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모른 채 서 있을 뿐이다. 알 수 없고, 따라갈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믿고, 따라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교만이다.


예수님의 옷은 세상의 그 어떤 빨래 기술로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희게 변했다(마가복음 9:3).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아무리 닦고 씻어도 그분의 빛남을 재현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을 닮고 싶어 하지만, 그 빛을 그대로 옮겨놓을 수는 없다. 인간의 손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알고 싶어한다. 머리로 이해하고 싶어했다. 지금 이 길을 가야 하는지, 왜 이런 고난이 있는지, 왜 어떤 일은 이해되지 않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변모하신 이 장면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너는 알 수 없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인간의 머리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듯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적인 인물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가실 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대화의 깊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얼어붙었을 뿐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예수님은 영광의 모습으로 변모하시지만, 곧 다시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오신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신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이 과정은 이해할 수 없다. 왜 빛나는 영광을 두고, 어둠과 고통을 향해 가시는 걸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신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우리는 따라갈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이끄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가복음 9:7).


제자들은 많은 것을 보고도 깨닫지 못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도 여전히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예수님의 옷처럼 희게 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좌절할 이유는 없다. 그 분은 알고 계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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