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 챌린지도 지옥 같은 현실의 지형을 바꾸지는 못한다

by 책뚫기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읽다 문득 우리 시대가 헬레니즘의 초상을 꼭 닮아있다는 생각에 잠겼다. 찬란했던 도시국가 아테네가 전쟁과 부패로 비틀거리다 제국의 일개 도시로 몰락했던 그때. 기존의 질서는 와르르 무너졌으나 새로운 질서는 아직 당도하지 않았던 그 아노미의 틈새에서 강박과 히스테리가 난무했다.


질서의 폐허 위에서는 각양각색의 정신병적 학파들이 우후죽순 피어났다. 무너진 가치를 비웃으며 ‘개처럼 살라’ 외치던 키니코스, 어차피 알 수 없으니 모든 판단을 유보하라는 회의주의, 정치의 풍랑을 피해 정원 공동체로 숨어든 에피쿠로스, 그리고 운명의 수레에 묶인 개처럼 기꺼이 그 길을 따르라던 스토아까지.


지금의 우리도 그 궤적을 그대로 밟고 있지 않은가. 유교적 전통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고, 세대 간 가치관은 절벽처럼 깎아질 듯 벌어졌다.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던 미국마저 질서를 지키는 수호자가 아닌, 무소불위의 칼을 휘적휘적 휘두르는 자로 변모했다.


대응 방식 또한 기묘할 정도로 닮아 있다. 선배 세대를 ‘틀딱’이나 ‘꼰대’라 조롱하는 키니코스적 냉소, ‘이생망’을 읊조리며 체념하는 회의주의적 흐름, 불멍과 소확행에 기대어 고통 없는 찰나를 탐닉하는 에피쿠로스적 도피, 그리고 갓생과 미라클 모닝으로 운명을 긍정하려는 스토아적 분투까지.


그나마 건강해 보이는 스토아식 노력도 결국은 개인의 성벽 안을 가꾸는 일일 뿐, 지옥 같은 현실의 지형을 바꾸지는 못한다. 개인의 챌린지가 세상을 바꿀 수 없기에, 그 긍정의 유통기한은 하루하루 짧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헬레니즘은 이 수렁을 어떻게 건너갔는가. 해법은 가톨릭 철학, 즉 교회의 등장이었다. 교회는 관념을 넘어 실재하는 분배 시스템을 혁신했다. 부자의 헌금이 가난한 이의 빵이 되고, 전염병의 그늘에서 기꺼이 간병인이 되어준 상호 부조의 공동체. 그것이 시대를 구원했다.


인내와 노력이 성공을 보장하던 ‘아메리칸 드림’의 유효기간은 이제 다했다. 도리어 노력할수록 마음이 병드는 시대, ‘쉬었음’ 청년들이 꾸역꾸역 쏟아지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분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철학이 구원자처럼 성큼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희망의 중심에 기어이 우리 대한민국이 서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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