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잘한 부족함과 두려움이 켜켜이 쌓여 비로소 '나'

by 책뚫기


존 버거는 그의 저서 《Ways Of Seeing》에서 그림을 '체험된 삶의 차원'으로 느껴보라 넌지시 권한다. 체험된 삶이란 무엇인가. 거창할 것 없다. 내가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다. 매일 아침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은은한 커피 향을 홀짝이며 정신을 깨우는 것. 밥벌이의 고단함을 묵묵히 감당하며, 나름의 옳음과 좋음을 꿈꾸는 것. 그 자잘한 부족함과 두려움이 켜켜이 쌓여 비로소 '나'라는 삶의 두께를 이룬다.


17세기의 화가, 프란스 할스가 그린 <자선 요양원의 이사들> 앞에 선다. 당시 할스는 여든을 훌쩍 넘긴 노인이었다. 평생을 가난과 씨름했고, 그해 겨울마저 자선기관의 적선으로 간신히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관을 운영하던 이사들이 자신들의 초상을 할스에게 의뢰한 것이다. 잠깐 작품을 보자.


%EC%9D%B4%EB%AF%B8%EC%A7%80.png?type=w1 프란스 할스, 자선 요양원의 이사들


존 버거의 말을 따라보기로 한다. 프란스 할스가 체험한 삶의 차원에서 작품을 느껴보려 시간을 낸다.


이사들은 갑이고, 할스는 을이다. 여든을 넘긴 노인은 살기 위해 붓을 들었고, 이사들은 자신들의 멋진 모습을 남기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초상화 속 이사들의 시선이 중구난방이다. 그들에게 초상화를 그리는 할스는 그다지 중요치 않아 보인다. 차갑다. 어쩌면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할스는 반쯤 투명 인간이 되어 이사들을 관찰하고 묵묵히 붓질을 했을 테다. 어쩐지 외롭고, 불편하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 묵묵히 붓질을 하는 여든 넘은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사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겠지만 분명 존재했을 그 노인이 내 머릿속에서 살아난다. 작품 속 이사들의 표정과 시선, 몸짓과 포즈, 그리고 붓질의 흔적 속에서 할스의 굽은 몸, 주름진 피부, 물감 묻은 손, 쓱쓱 거리는 붓질 소리, 서늘한 공기와 숨소리가 느껴진다. 왠지 눈물이 핑 돈다. 말로는 담기 어려운 아릿함, 눌어붙은 포장지를 뜯은 삶이라는 날 것이 내 몸에 들어온다.


프란스 할스의 삶은 그의 것이다. 그리고 프란스 할스는 죽었다. 나는 그를 모르고 그 또한 나를 모른다. 나는 그의 삶을 소유하지도 구성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그의 작품 속에 당시의 프란스 할스가 남아 있다. 나는 물리법칙이 작동하는 지구에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작품 속에 남아 있는 프란스 할스를 되살린다. 날 것 그대로 프란스 할스의 삶이 살아나는 순간 내 삶의 눌어붙은 포장지가 덩달아 뜯겨진다.


프란스 할스, 그를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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