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방영됐던 tvN 드라마 ‘빈센조’에 등장하는 악역 중 검사 출신 로펌 변호사 최명희(배우 김여진)가 있다. 그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에어로빅 복장으로 줌바댄스를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상하 좌우 눈치 다보며 지내야 하는 사무실에서 최명희처럼 ‘발가벗고’ 지내는 누군가 있다. 사무실을 집보다 더 편하게 여긴다. 견제되지 않고 감시받지 않는 권력이어서 그의 안하무인은 점점 더 커져간다. 남들은 업무 전화마저 손으로 가리고 조용히 받는데, 그의 사무실에선 온갖 음악소리, 주식 매매 체결 안내음, 부하직원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 등이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그 공간에선 ‘발가벗은’ 그가 왕이기 때문이다.
‘발가벗은 임금’ 같은 임원에게 30분 넘게 폭언을 들은 동료를 위로한 적이 있다. 중년의 고위간부이자 두 자녀의 아빠인 그 동료가 느꼈을 모멸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주고 싶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당하고 있으면 너무 힘들지 않아?”
“그 성질 잘 아니까 그러려니 하지 뭐. 그렇게 폭언한다고 넋 놓고 있으면 다음에 또 깨져. 정신 바짝 차리고 그 욕설 중에서 다음 보고서에 수정·반영할 내용을 기억해 둬야 해. 그래야 같은 사안으로 또 안 깨져.”
쏟아지는 쓰레기 같은 욕설 속에서 생존을 위한 단어들을 ‘분리수거’하는 모습이 연상됐다. 그 동료는 늘 “난 늦장가를 가서 아이들이 아직 어려. 무조건 정년까지 견뎌내야 해” 하곤 했다.
세상이 그렇듯, 사무실에도 좋은 상사들이 훨씬 더 많다고 체감하며 살아왔다. ‘사무실의 발가벗은 임금’은 극소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숫자가 극소수라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높은 자리, 큰 권력을 가진 1명의 악영향은 수십, 수백 명, 나아가 조직 전체에까지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화 속 벌거벗은 임금님은 멍청할 뿐 누구에게 큰 피해를 준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임금님이 벌거벗었대요”라는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외침을 듣고 뒤늦게라도 부끄러움을 깨달았다.
‘사무실의 발가벗은 임금’은 자신의 폭언이나 발가벗음조차 조직이나 회사의 발전을 위한 나름의 헌신이라고 생각한다(폭언은 업무 능력 떨어진 부하직원의 발전을 위한 사랑의 채찍질이고, 자신의 발가벗음은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조직문화를 위한 솔선수범이라고 포장하곤 한다). 그 사무실의, 그 공간의 ‘왕’인 만큼 견제나 감시를 제대로 받지 않는다.
“당신만 왜 사무실에서 발가벗고 있나요?”라고 외치려면 그 임금과 정면으로 맞서 부서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굳이 그 힘든 길을 왜?’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래서 분유값 등록금 대출이자가 걱정되더라도 떠나거나, 분유값 등록금 대출이자를 위해서라도 견디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