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쓰는 임주아와 책만드는 이승희 서신교환
친애하는 그대에게
<시쓰는 임주아와 책만드는 이승희 서신교환>
다산은 말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말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해서 기쁘고, 안 할 수 없고, 내가 다른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라. 자신의 장점을 파악해서 개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 저 일 기웃거리지 말고, 핵심역량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분야를 개척하라. 그러자면 평소에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안목을 갈고 닦아야 한다. _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중에서
지난 서신의 인용문 중 ‘명료한 삶이란 얇은 비닐봉지처럼 위태로운 것’이란 부분이 마음에 박혀 몇 번을 읊조렸습니다. 제 앞으로 배달된 그 구절은 저로 하여금 꼭 고해성사를 본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였습니다.
저는 요즘 다음 달부터 시작하는 ‘My Defragment(나의 조각모음)’ 프로젝트 준비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30일간 매일매일 나에 대한 질문이 주어지고 마지막에는 그동안의 답변을 모아 책만들기 워크숍을 통해 자신의 손으로 책을 완성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읽어야 할 책도 많고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으나) 써야 할 글도 많은데 마음이 산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엊그제는 마마모 모임과 이 준비로 근 몇 개월 만에 신나게 책을 읽었습니다. 더 이상 미루거나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조급한 마음에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찾아 알게 되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무척 좋아하는 저 자신을 다시금 자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을 실천하고 주변에 공유할 때 보람을 넘어 희열을 느낀다는 사실도요. 정말 오랜만에 집중해서 책을 휘리릭-휘리릭- 읽으며 이렇게 좋은 걸 코앞에서 두고서 왜 읽지 못했을까 의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처음 맛보는 책의 즐거움도 아닌데 제가 그런 것인지, 사람 자체가 그런 것인지 참 미련하다 합니다. 또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많은 일들이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못하는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것들만 실천을 하며 살아도, 앞으로 더 이상 무언가를 알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앎’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앎이 실천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한 힘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지금에서야 시작을 하지만 꽤 오래전부터 꿈꿔 온 일 중 하나입니다. 2013년에 책공방을 만나 책의 다양한 맛을 알게 된 저는 2014년부터 매년 연말이면 나만의 연말정산 개념으로 ‘나를 위한 책만들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너무 좋아 지금까지 그 작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지난주에는 책공방 일에 치여 등한시했던 제 개인의 기록인 2015년의 책 작업도 마무리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매년 책만들기 실험실을 통해 ‘나를 위한 책만들기’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작업의 특성상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음이 항상 안타까웠으나 이번 기회에 꽤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어 기쁩니다.
책공방에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으나 그중에서 가장 핵심의 키워드라 할 만한 것 중 하나는 ‘책’이라는 사물이 읽기 위해서나 읽히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매일 같이 다양한 사람들과 책만들기 수업을 하면서 또 자서전학교를 통해서 지역의 어르신들과 함께 책을 만들 때도 책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전에 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나에 대해 말을 하거나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나에 대해 생각을 해야만 하는데 이렇게 특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그러한 생각은 바쁜 일상에 쫓겨 항상 후순위로 밀리거나 무-쓸모로 치부되곤 합니다. 그런데 나에 대한 책을 만들기 위해 나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면 그동안의 나에 대해 인지하게 되고 곱씹게 되며 그러한 시간은 나 스스로가 나 자신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긍정하게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서신을 씀으로써 내가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내가 그렇게 말을 하고 생각을 하고 행동했음에도 시간이 지나면 이를 잊게 되는데 그럴 때 책의 유용함은 또 한번 발휘됩니다. 굳이 책을 열어보지 않아도 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만들었던 경험이 떠오르게 됩니다. 내가 무언가가 필요할 때에 내가 위로가 필요할 때에 과거의 내가 저자인 내 책은 그 누구보다 큰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지금보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펴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어느 누구도 아닌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책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던 저라서 오래간만에 설렘을 느꼈습니다. 제 머리와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일이 현실이 되고 그동안 저만 알고 누렸던 경험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 ‘하고 싶은 일을 통해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인생 목표인 제가 그 목표에 한 발 다가서는 기분입니다.
새로운 프로젝트 준비로 요즘 다시 박차를 가하려던 저의 원고 작업은 또다시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으나 이 와중에도 책공방의 일도 등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다양한 프로젝트를 확장하는 이유조차 책공방에서 더 오래, 더 많은 일들을 하기 위한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저는 계속해서 책공방에 함께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책공방이 사라져도 삼례에서 오랫동안 책방을 하겠다는 그 꿈에서 ‘삼례에서’를 제외키로 했습니다.
최근 1년 사이 '삼례'는 너무 빠른 속도로 변화했는데 앞으로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만 같아 속이 울렁거립니다. 지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제가 지레 죽을 것만 같습니다. 문화의 중심에 사람이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할 것과 바꿔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말로만 문화를 외치는 세상과 사람들에 넌덜머리가 납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책공방의 부족한 면들을 지적하며 저에게 세상을 너무 모른다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그러할지도 모릅니다. 허나 그딴 세상 따위 평생 모르고 살아가렵니다.
주아님 우리는 적어도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서로에게 위로와 긍정만이 아니라 보통 애정을 갖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랍니다. 때로는 상대방이 싫어하거나 서운해할 만한 이야기일지라도, 상대방에게 필요한 이야기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그런 찐-한 사이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관계 또한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약속했던 마지막 서신을 쓰게 된 것처럼 어떠한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다시 제 궤도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길 기대합니다.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쓰고자 마음먹었던 서신이 이제 정말 마침표만을 앞두고 있습니다. 비록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하고 있긴 하지만 ‘편지’라는 매체 자체는 Young- 보다는 Old-에 가깝습니다. ‘친애하는 그대에게’라는 프로젝트 이름도, ‘서신’이라는 단어도, ‘그대’에게 라는 호칭도. 어느 것 하나 신박하기보다는 진부하고 진부함을 넘어 낯간지러움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주아님도 나도 그러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선택을 했던 우리의 시작을 떠올려 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끝을 앞두고 시작을 떠올리는 것 자체도 굉장히 올드- 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를 피하지 않기로 합니다.
‘친애(親愛)’라는 단어는 한자어로 ‘친할 친’에 ‘사랑 애’를 써서 친밀히 사랑함 또는 그 사랑이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사랑해’라는 말은 일방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으나 ‘친애하다’라는 말은 쌍방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게 느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김환기를 비롯한 그 당시에 여러 예술가들이 편지에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을 종종 보곤 했습니다. 그 단어가 가지는 뜻은 물론 어감이 좋아 나중에 나도 꼭 한번 써보았으면 했는데 그대 덕분에 이렇게 원 없이 써보아서 이제 그 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된 듯합니다. ‘그대’라는 호칭도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주아님, 서신을 쓴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낯선 기분이었습니다. 또 만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할 이야기가 많지 않아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싶었는데. 이렇게 시작하고 보니 할 이야기가 차고 넘쳐 약속한 분량을 또 초과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서신에서 저는 서신을 쓰고 싶지 않았던 마음과 대결을 하였다면 이번 서신에서 잘 쓰고 싶은 마음과 대결을 벌였습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그 무언가를 하기 싫어하는 마음도 방해가 되지만 그 무언가를 잘하고자 하는 마음도 방해가 됩니다. 그러니 적당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질 다양한 이야기를 기대하며
2021년 02월 23일 밤 열한 시에 이승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