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수집』 / 설동주 쓰고 그림 / ㈜북스톤
“마지막 재료는 ‘시간’이라는 말 있잖아요. 이 건물이랑 골목, 가게 다 시간을 품고 있는데, 그런 공간과 대비돼서 저희 가게도 새롭게 보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은 시간을 품고 있는 것의 가치가 너무 낮게 평가되는 것 같아요. 이 가치가 잘 지켜지면 좋겠어요. p.61”
세상은 멀미가 날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서울은 더 빠른 속도로 변한다. 변화의 속도에도 가속도가 붙어 과거엔 10년에 걸쳐 변화했던 것들이 10년도 안 되어 변하고, 어떤 곳은 불과 1년 사이의 천지개벽이라 할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을지로는 충무로와 함께 지난 10년간 가장 많은 변화가 일어난 지역 중 하나이며 내가 사랑하는 책공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더 주목하게 된다.
『을지로 수집』은 이러한 을지로의 풍경을 사진과 일러스트와 이야기(인터뷰)로 기록한 결과물이다. 지역을 기록함에 있어 다양한 방식을 택했다는 것과 을지로의 표정, 풍경, 공간, 물건, 간판, 시간, 대비로 목차를 분류한 것이 인상적이다. 이 책에서 꼭 하나 기억하고픈 생각은 시간에 대한 가치다. 빈티지 의류와 음반을 함께 판매하는 ‘오팔’의 주인장 중 한 명인 윤소영은 을지로가 먼저 있던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깨뜨리지 않는 선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스며들고 모두 다 바뀌어버리지 않는 변화가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또 다른 주인장인 김요한은 시간을 품고 있는 것의 가치가 너무 낮게 평가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아날로그와 빈티지를 사랑하지만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날로그와 빈티지의 장점이 있고 디지털과 신문물의 장점이 있다. 상황에 따라 어떠한 것이 적합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언정 상황을 배제한 채로 이 두 가지의 것을 두고 어느 것이 우위에 있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새로운 것만큼이나 오래된 것도 중요하고 오래된 것만큼 새로운 것이 중요하기도 하다. 가치만으로는 어느 것 하나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책공방 문화에 흠뻑 취한 나의 취향과 선호가 오래된 것일 뿐이다.
변화 또한 그러하다. 변화 그 자체는 나쁜 것이라 할 수도 좋은 것이라 할 수도 없다. 다만 어떠한 변화인가부터 시작해 그 변화로 인해 파생되는 많은 것들에 따라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된다. 그 변화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하게 되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기울어지는 것, 균형이 깨지는 것, 한쪽으로 쏠리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문제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이 기울어진 채로 살아왔고 시간을 보냈다. 물론 소수의 사람이 그 기울어짐을 바로 잡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제야 그 기울어짐을 바로 잡고자 하는 움직임이 조금이나마 큰 흐름을 만들어 낸 듯하다.
내가 생각하는 을지로의 매력은 ‘세월의 흔적과 다양함’인데 저자는 다양한 방식의 기록의 방식을 택함으로 그러한 매력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예전부터 탐이 났으나 내려놓았던 ‘나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하는 욕망이 다시 움찔움찔한다. 그리고 예전부터 욕심을 내는 중이나 좀처럼 잘되지 않아 안타까운 ‘사진’을 잘 찍으면 너무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더욱더 확고해진다.
책과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책 읽는 일이 어떠한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함보다 어떠한 동력이나 영감을 얻기 위함이 더 크다는 생각에 무게가 실린다. 다음은 이 책에서 내게 에너지와 영감을 가져다준 그러니까 내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다. 익숙하지만 새롭게 다가오는 것도 있고 생각하지 못했으나 깨닫게 해 준 것들도 있다.
(오팔) 앨범 커버는 좋아하는 음악을 손으로 만지는 느낌, 악보를 보는 느낌 p.55 // (망우상림) 감동받을 수 있는 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 / 기대감이 사진의 가장 큰 매력 / 필름은 이야깃거리를 참 많이 만들어줘요. p.87 // (노말에이) 안전한 방향을 추구하게 됐다고 해야 할까, 예전에는 특이한, 날것의 책들이 많았거든요. / 누구나 창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 p.113 // 우리 가게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p.135 // (디자인점빵) 일을 만들어서 하는 세대/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 / 센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 버티는 놈이 센 놈이라는 걸 증명하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p.146 // (에이스포클럽) 새로운 것은 환영받지만 오래된 것은 사랑받아요. p.178// (CAC) 버티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버텼는데 콘텐츠가 좋았던 거고, 콘텐츠가 좋으면 되는 거구나 싶어요. p.212
이 책은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몇십 년째 같은 상호로 운영되고 있는 ‘풍년 이발소’부터 시작해서 비주얼 스토리텔러 권동현과 디자이너 이동훈이 함께 하는 ‘CAC(청계아트클럽) 스튜디오까지 총 일곱 가지 공간의 알록달록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래서 을지로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을지로가 가진 매력을 더욱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게 하고, 을지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을지로의 매력을 하나하나 짚어주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을지로에 대해 알거나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이 읽어도 좋고, 어떠한 지역을 기록하고자 하는 예비 기록자들에겐 기록의 다양성을 접할 수 있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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