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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Aug 30. 2023

76. 열한 편의 소설 같은 일기

『일기』 / 황정은 / 창비

78. 열한 편의 소설 같은 일기

『일기』 / 황정은 / 창비


저자의 일기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일기와는 많이 달랐다. 길고 넓고 깊었다. 하루하루 일상을 적기보다 어떠한 현상을 바라보고 거기서 연상되는 다양한 생각과 사건과 감정에 대해 적었다. 매일매일 운동을 하는 일상을 통해 접한 작가의 꾸준함을 반가웠고 자신의 운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운동 환경(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관점이 좋았다. 단단함으로 시작했으나 뒤로 갈수록 단단함을 너머 물을 잔뜩 머금은 솜이불 같은 무거움이 느껴졌고 책의 후반부에 가서야 그 무거움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사는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p.41 /서로가 서로의 삶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고통스럽고도 경이로운 공동의 경험을 통해 이미 배운 적이 있다. p.38 ”


나는 종종 누군가의 희생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위 내용을 마주하며 다시금 그 생각에 머물렀다. 작가는 약자, 사회 구조, 노동, 현상 등에 관심을 두고 있고 어쩔 수 없는 현실과 무의식과 무관심과 무방비의 폭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듯했다. 나 역시 그러한 부분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사람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사회적 정책이나 구조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고, 반복되는 사고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태도를 가졌으면 한다. 물론 생각만큼 관심을 갖거나 활동을 하고 있지 못하고 지금 현재는 많이 외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의 관심과 지향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현재의 나의 외면이 정당화될 수 없고 개선되어야 하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론 내가 고르는 책들이 참 한결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고른 책이니 나와 결이 맞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결이 맞는지 여부를 책 선택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이 책을 고를 때도 이전 책을 고를 때도 나의 정치 성향이나 사회적 관점이 유사한지 유사하지 않은지를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그저 나는 <나의 기록학교> 모임을 진행함에 있어 책의 난이도나 형식, 내용 등을 기준으로 삼아 판단했을 뿐인데 뭔가 기울어진 나의 성향이 그대로 투영된 듯해서 겸연쩍었다.


“단념하지 않고 생각을 계속하는 일과 사랑을 계속 생각할 수 있는 마음” 이 책의 37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서 두 번째 줄을 차지하고 있는 문장이다. 입에 넣자마자 달콤함이 퍼지는 디저트가 있는가 하면 씹을수록 혹은 음미할수록 맛이 나는 음식이 있다. 후자의 음식들은  대체로 특유의 독특함이 있고 맛이 다채로운 편인데 내게는 이 문장이 그랬다. 이 책에서 내 마음에 가장 와 닿았던 내용은 이 내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유일하게 한 부분을 기억할 수 있다면 이 문장을 택하고 싶다. 자꾸만 곱씹게 되고 곱씹을수록 처음 마주했을 때 알지 못했던 깊은 맛이 자꾸만 나는 듯하다.


소설가가 쓴 일기라서 그런지, 그의 경험이 소설 같아서 그런지 일기가 아닌 소설을 읽은 기분이었다.  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그보다는 문학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어쨌든 그들의 글은 역시 다르다고 생각했고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목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다. 목적이 다르기에 관점이 다른 것인지, 관점이 다르기에 목적이 다른 것인지 알 수 없고 중요치도 않지만 가장 크게 그 두 가지가 다르다.


그러한 탓에 책을 읽는 동안 문장이 참 좋다는 생각을 여러 번했다. 그 결과 ‘문장’이라는 말이 싫다는 작가의 여러 문장들을 곱씹고 기억하고 싶어 밑줄을 긋고 그것으론 모자라 옮겨 적어 본다. 내가 선택한 문장 뭉텅이들을 세 가지 빛깔로 나눠 본다. 제대로 된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노란 빛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듯한 회색의 빛깔, 쓰기를 넘어 쓰는 삶과 연관되어 흑심을 닮은 까만 빛깔의 문장.




노란 빛깔의 문장들

“우리는 기꺼이 우리 자신을 알고자 하고, 우리가 기여한 모든 것을 더욱더 제대로 인식하고, 우리의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삶을 바탕으로 정직하게 책임을 지고 발언해야 한다. / 당신들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의 죽음과 다시 싸우겠다던 사람의 죽음 / 많은 것들이 그렇게 변한다. 그러나 내가 그 변화를 매번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조금이라도 인간이 덜 부지런하게 사는 것이 이 행성에 이롭다”


회색 빛깔의 문장들

내가 모르는 남의 삶의 조건을 기웃거리는 질문 / 구조가 문화가 되어버린 환경/ 차별받았다는 생각으로 분노할 줄은 알지만 차별한다는 자각은 없는 삶들. / 실은 동질하지도 않은데 동질하다는 강한 암시와 압박이 있고 그 속에서는 동질성 자체는 물론이고 이질성이나 다양성의 생각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 누군가를 즉시 비난할 준비/ 과거를 짐작할 수 있는 지표/ 내가 겪은 일이 나를 먹어치우지 않도록


까만 빛깔의 문장들

망설이며 시간을 보내다가 쓸 수 없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 쓰고 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의 저자와 나 사이에 다른 이름과 다른 얼굴이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쓰는 일이 오로지 견디는 일로 여겨졌다. 쓰는 일이야 대개는 견디는 일이지만 오로지 견딜 뿐이라면 그것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쓰는 일을 두려움 때문에 중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 쓰고 싶지 않다거나 쓸 수 있다거나, 아무튼 쓰는 것을 생각하는 일은 쓰지 않는 틈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도 새삼 알았다./ 말이 넘쳐 쓸 수 없었다.”


이 책은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는 2021년에 쓰인 열한 편의 일기로 이루어져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줄줄줄- 읽히기보다 툭툭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문장과 문장이 그랬고 문단과 문단이 그랬고 글과 글이 그랬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분절된 듯 연결되어 있었다. 빵과 빵 사이에 잼을 약간 부족한 듯하지만 막상 먹어보면 딱 적당한 맛이 나는 느낌, 비빔밥에 고추장이 과하게 들어가지 않아 재료들이 제각각 노는 것 같지만 잘 어우러지는 느낌, 무언가 과하지 않는데 그것이 부족함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어느 것 하나가 무언가를 점령하지 않은 듯했다. 이러한 특징이 불편하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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