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포님, 잘 지내셨나요? 지난주였을까요, 인어 비늘처럼 얇던 이불을 솜이불로 바꿨습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에 잠을 설쳤거든요. 용도가 뭔지도 모르겠을 얇은 이불 대신 폭신한 면이불을 덮자니 포근한 맛에 아침에 일어나기가 더 힘들어진 요즘입니다.
에이포님을 엘레베이터에서 만났던 그 날, 저는 신촌역에서 햇살을 등지고 회사까지 걸어오는 참이었습니다. 마스크 속 인중에 땀이 맺히고, 땀이 흐르고, 그 땀이 말라 피부가 얼마나 간지럽던지. 그 찰나에 신호등에 서 있는 에이포님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습니다. 긴 바지에 긴 소매 셔츠, 그리고 긴 머리를 풀고 있는 모습은 다른 계절을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거든요. 그 날, 엘레베이터에서 던졌던 한 마디는 너무 더워 외쳤던 일시적인 비명 같은 거였습니다. 저는 즉시 사무실로 들어가 에어컨을 켜고, 에이포님이 긴 셔츠에, 긴 바지에, 긴 머리를 풀고 다닌다는 일화를 팀원에게 전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시큰둥하게 말하더군요. '더위를 안 타나 보지.'
에이포님과 제가 남들보다 추억이 별로 없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이 상태가 좋습니다. 앞으로 알아가게 될 모습들이 신선하게 느껴질 테니까요. 뒷모습만 보고도 '어라? 에이포님?'이라고 외칠 수 있는 반가움보다, '이 사람, 이런 면이 있었어?(웃음)'이라고 느끼는 그 순간들이 사실 저는 조금 더 기억에 남습니다.
남편분은 아직도 만화를 그리시나요? 사랑꾼 만화를 볼 때마다 저는 마음 한 쪽이 간질거렸습니다. 평소 친구 같은 연인관계가 이상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만화를 보면서 이렇게 사랑받는 에이포님은 도대체 집에서 어떤 모습일지 혼자 상상도 해봤습니다. 회사에서 보는 정제된 모습이 아닌 흐물흐물한 모습일까요? 물에 젖은 벽지와 바닥을 보고도 괜찮다고 크게 웃는 호탕한 모습일까요? 어떤 모습이든 현재 가진 행복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분께 만화를 언제 업로드 하실 지, 일정을 물어봐 주세요. 독자가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주시고요.
저는 문과 출신입니다. 영문과요. 저는 제 과가 싫었습니다. 싫다기보다는 특징이 없어서 좋아하지 않았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무역학을 복수전공 했습니다. 결과는 지금 제가 하는 일을 보시면 압니다. 지금 저는 무역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지만, 20대 시절엔 무역시험을 보면서 언젠간 인천항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겠거니 상상했습니다. 우리 삶은 항상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예측대로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 삶은 항상 예측 불가였습니다. 에이포님은 어땠나요?
어제 저에게 위로를 건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에 '외골수'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쉽게 빠지고 질리지만, 상당히 외골수적 기질이 강해서인지, 걱정도 하나에 꽂히면 며칠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전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일로 불안에 떨던 저를 단번에 안심 시켜 준 것은 공대에 다니던 분의 '확률적 근거'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그는 28살이었고, 제가 걱정하는 일은 '비행기가 추락할 확률보다 적다'고 말하며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안심을 했는지, 안 했는지 사실 기억나지 않지만, 12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상황만 기억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인상 깊었던일인 듯 합니다.
에이포님, 우리는 종교가 같습니다. 어제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에이포님 전 직장을 제가 알고 있으니 쉽게 추론할 법한데 그 생각까지는 못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 아는 게 적습니다. 앞으로 많이 알아가면 됩니다.(웃음) 누군가 제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이 시기를 모두가 불행으로 볼 때, 우리는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그리고 선한 일을 할 때가 아니냐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며칠 동안 되새겨 봤습니다. 제 기준에 있어 맞는 말 같습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저는 '제 자신'에 대해 더 집중하게 되었거든요. '제 자신'에 집중한다는 건, 반성하게 되었다는 말과도 얼추 들어맞습니다.
에이포님은 요즘 어떤 것에 집중하나요?
한겨울 폐까지 들어오는 찬 공기를 좋아하는,
고로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