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참고 Whale 다이브

클레어 키건

by 책여사



“와 씨, 진짜 미친 거 아니ㅇ...?!”



나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틀어막으며 숨을 고르고 주위 눈치를 살핀다. 다행스럽게도 카페안 그 누구도 내게 관심 없는 듯 하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미간이 심하게 구겨지는 편인 데다 엉엉 울거나 와하하 웃는 등 리엑션이 커서 종종 남편의 걱정을 사기도 한다. “괜찮아? 무슨 일 있어?”하고 옆방에서 달려와 허겁지겁 나를 살피는 남편의 눈앞에 책에 과몰입해 엉엉 우는 내가 수시로 발견되곤 하니까. 그렇게 집에서 새던 바가지는 밖에서도 줄줄 새고야 마는데... 카페와 도서관,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도 책을 읽다 북받쳐 오르는 감흥을 주체하지 못해 주르륵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곤 한다. 사연 있는 사람처럼 보이면 다행이고, 반쯤 미친 사람처럼 보이면 어쩌나 가끔은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러니 오늘 이 정도면 선방했다. 지금 내 머릿속에 들끓는 복잡한 생각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충격, 그로 인한 즐거움(?)을 주위 사람들이 눈치챈다면 내 사회적 지위는 조금 박탈당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는 사람 하면 보통 지적인 분위기를 먼저 떠올릴 테지만, 사람들은 내가 이런 책을 읽는 걸 알까. 과연 이 책을 ‘이런 책’이라고 평가절하하듯 대해도 될까. 안되지, 안돼. 안되고 말고.






나는 지금 클레어 키건의 단편집 《남극》을 읽고 있다. 1년 평균 열 쪽씩 쓴다는 작가 클레어 키건. ‘말 없는 소녀’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한 원작 소설, 《맡겨진 소녀》로 그를 처음 만난 후, 이 작가의 말한다고 느껴지는 쓰는 방식과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역설이 절로 떠오르는 작품 세계에 매료되어 국내 번역 출간된 모든 작품을 따라 읽어오고 있다. 그중 최근 출간된 《남극》은 지금은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오른 키건이 20대에 쓴 단편 15편을 묶은 소설집으로, 첫 이야기부터 충격과 공포 그 자체다.



첫 단편이자 표제작인 〈남극〉은 평온한 일상을 뒤로하고 '단 한 번의 일탈'을 꿈꾸는 한 중년 여성의 이야기다. 그럴듯한 핑계로 다정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이에게서 벗어난 그녀는 홀로 호텔 체크인을 하고 평소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며 묘한 기대에 찬 하루를 시작한다. 잠깐의 탈선을 마음먹은 그녀 앞에 행운처럼 나타난 한 남자. 그의 손은 꽤 거칠었지만 술에 취한 그녀에겐 땀냄새 짙게 배인 낯선 남자의 체취마저도 완벽하게 느껴진다. 마치 늘 그래오기라도 한 듯 욕조에 몸을 누인 그녀 앞에서 면도를 하고, 부드러운 거품을 내어 아이 다루듯 여자를 다정하게 씻겨주는 남자. (오 마이 갓. 내 남편이 나를 씻겨줘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것 같거늘...!) 손수 따뜻한 음식을 차려주며, 그녀가 잊고 살았던 여자로서의 감각을 깨워줄 줄 아는 남자.



아슬아슬한 하룻밤 불장난이 끝나고 이제 다시 남편과 아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이건 소설이 아니다. 소설엔 이보다 더한 사건이, 비극이 필요하니까. 주인공에겐 미안하지만 더 비극적일수록 좋다...) 남자가 잠든 사이 몰래 빠져나와 호텔 체크아웃까지 마친 그녀는 한 번 더 남자의 집으로 향하게 된다. 열차 시간이 남았다는 사소한 핑계, 어쩌면 조금 더 짜릿함을 연장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을지도... 하룻밤 일탈의 행운이 불러온 이야기의 끝에서 〈남극〉이라는 제목은 드디어 제 몫을 다한다.






클레어 키건은 크게 떠벌리는 작가가 아니다. 작게 말해서 청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노련함이 있는 말수 적은 달변가다. 많은 말을 하지 않으므로 단어 하나하나에 실린 무게감이 남달라 곱씹어 읽게 하고 다시 읽게 한다. 평소 묵직한 분량의 장편소설에 깊이 빠져드는 걸 좋아하는 나이지만 물리적으로 얇디얇은 그의 이야기가 충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키건 특유의 무게감 있는 문체 덕분일 테다.



키건의 문장을 읽는 건 아무런 장비 없이 숨을 참은 채 탁한 호수 바닥으로 잠수하는 일과 같다. 작가가 허락한 만큼 아주 조금씩 시야가 확보되는데, 그 희박한 단서들을 동아줄 삼아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깨닫게 된다. 내가 딛고 서 있던 어둠은 호수 바닥이 아니라, 심해를 유영하는 거대한 고래의 등 위였다는 것을. 작은 이야기 안에 이토록 거대한 세계를 숨겨두는 키건의 탁월함은 매번 나의 숨을 막히게 한다. 퍼렇게 벼려진 서늘한 칼날 같은 결말이 가슴에 꽂히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으며 비로소 물 밖, 아니 현실로 복귀한다.






평일 오전의 평온함과 무료함이 뒤섞인 카페의 풍경을 생경해진 눈으로 다시 바라본다. 화요일 오전 11시. 오래된 공장을 게조해 만들었다는 이 카페엔 늘 사람들이 가득하다. 아이들 등원시키고 잠시 커피타임 갖는 엄마들 네 팀, 노트북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히고 앉아있는 사람 다섯 이상, 눈에 띄게 말쑥한 차림으로 보험상품을 설명하고 마주 듣고 앉은 두 팀, 나처럼 혼자 책에 시선을 두고 있는 사람 여럿. 평일 오전의 카페가 이다지도 붐비다니, 회사원 시절의 나였다면 ‘이 세상 일은 나만 하는가’ 하는 박탈감에 시달리고도 남았을 풍경이다.



삼삼오오, 따로 또 같이 흩어져 앉은 저마다의 일상에 키건의 서늘한 이야기를 흩뿌리고 싶은 충동이 일렁인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은지도 모르고 살던 내게 키건의 글이 얼음물 같은 죽비가 되어주었듯, 무료한 일상에 시달리는 이가 있다면 그의 글은 최고의 처방이 되어줄텐데! 무심하게 오르내리는 엄지손가락 아래 흩어지는 숏츠의 소문자 도파민으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심장 끝까지 저릿해지는 '대문자 도파민'의 세계로 여기 있는 모두를 초대하고 싶다. 비극적인 결말을 읽어버린 것이 내게는 오늘 최고의 행운이자, 심장을 얼어붙게 만든 기분 좋은 실수라는 걸 저들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키건의 거의 모든 책을 섭렵한 지금, 이제 더 이상 나를 놀라게 할 입틀막 모먼트가 남아있지 않을까 걱정이냐고? 천만에. 그의 문장은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른 각도로 심장을 찔러온다. 나는 기꺼이 새 마음으로 그가 설계한 차가운 남극으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있다.



| 클레어 키건 국내 출간작 |
2023 《맡겨진 소녀》, 2023 《이처럼 사소한 것들》, 2024 《푸른 들판을 걷다》, 2025 《너무 늦은 시간》, 2025 《남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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