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산이챌린지 again - week 5 (230828~230903)
* 작성 글 내용은 인스타그램 @n0.date님의 활동지 제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글은 평어로 쓰였습니다.
Day 29 | 8/28
* 꼼꼼히 읽기:
| 猶有善路(유유선로) : 오히려 선함(착한 길)이 남아있다.
* 오늘의 문장:
착한 일을 하고서 남들이 알아 달라고 조바심을 내니
착한 일이 바로 나쁜 짓의 뿌리가 된다. (p.7)
* 한 걸음 더:
1. 처음 읽었을 때는 이 글 자체가 그냥 공감이 안 됐거든. 나쁜 짓을 했는데 착한 일로 가는 조짐은 뭐고, 착한 일을 하고도 나쁜 짓의 뿌리가 된다니 뭔 소리야… 했는데 절대 선과 절대 악은 없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했어. 착한 일이 나쁜 짓의 뿌리가 된다는 건, 얼마 전 논란이 됐던 이웃집의 백호누나가 생각났고, 나쁜 일을 했는데 착한 일로 간다는 건 딱히 생각이 안 나네 ㅠㅠ 나는 인간이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도 절대적으로 악한 존재도 아닌 복잡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범죄자도 착한 일을 할 수 있고, 모두가 성인이라 칭송하는 자도 나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렇게 생각하니 이 글이 조금 이해가 됐어.
Day 30 | 8/29
* 꼼꼼히 읽기:
| 이주란의 소설 속 인물들을 가족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몸속에 흐르는 피가 아니다.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받은 고통에 대한 공통된 경험이다. 혈연이라는 질긴 믿음을 허상으로 만들면서 무너트린 가족의 자리에는 고통으로 새롭게 형성되는 가족이 있다.
| 한눈을 팔면서 자신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소소한 이유들을 찾는다. 이주란의 소설이 미래를 기다리는 방식이란 “이번 생은 망했어”라고 말하면서도 지금보다는 나은 미래를 소심하게 기다리는 우리의 현재와 닮았다.
| Q. 작가님이 소설을 쓰는 이유를 여쭙고 싶어요.
A. 가끔 그런 질문을 받게 돼서 대답을 늘 약간 바보처럼 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사실 똑바로는 말을 못 하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제가 술 마시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건 다 타인이잖아요. 소설 쓸 때는 제가 저랑 이야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Q. 자기 자신을 타자화 하는 경험을 소설을 쓰면서 하시는군요) 네 재밌어요.
* 오늘의 문장:
그럼. 우리가 이렇게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 않겠니?
아버지가 대답했다. 취한 것 같았다. (p.24)
* 한 걸음 더:
1. 글을 읽으면서 ‘동상이몽’이라는 단어가 자꾸 떠올랐었거든. ‘우리가 이렇게 함께’ 란 제목처럼 같은 공간엔 있어도, 인물들이 각자 서로 다른 생각들로 어지러워 보였고, 정말 함께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서. 어떤 과거의 일로 가족 구성원들이 멀어진 것 같은데 (특히 언니와 아버지) 과거 이야기가 굉장히 궁금해지는 글이었어. 1, 2, 3 이렇게 넘버링이 된 것도 글에 단절의 느낌을 강하게 주면서 단절된 가족의 모습을 더 강조해서 보여주는 것 같았어. 개인적으로 왜 엄마 개와 아들 개의 성적인 행동?을 굳이 두 번이나 설명하면서 주목했는지 궁금했어.
2. ‘우리가 이렇게 함께’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정말로 그들이 함께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남편이 다시 집에 돌아와서 네 식구가 함께 살고 일을 하기 바라는 어머니, 하지만 다시는 무언가를 지키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많은 것을 포기한 채 홀로 생활하는 아버지, 아버지와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언니, 그리고 나. 이 가족 구성원이 정말로 이렇게 함께 하는 게 좋은 걸까? 난 의문이 들었고, ‘혈연이라는 질긴 믿음을 허상으로 만들면서 무너트린 가족의 자리’라는 말처럼 그들이 이렇게 함께 한다고 해서 관계가 회복될 것 같지도 않아. 일단 대화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사람들 같아서. 그래서 제목이 반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Day 31 | 8/30
* 꼼꼼히 읽기:
| 오늘날 K-성형 과학은 ‘자연스러운 한국인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 오늘의 문장: 살아 있는 신체이자 아직까지 어떤 과학이나 기술로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 개개인의 몸에 개입하는 이상 성형수술은 완벽한 미인을 생산해 낼 수 없다. (p.34)
* 한 걸음 더:
1. 내용 요약
- 쌍꺼풀 수술의 인종주의적 역사
: 눈은 의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아시아인과 서양인의 차이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위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쌍꺼풀 수술을 하는 이유가 다양하게 변화함
- 세계로 진출한 한국 미인
: 한국인의 세련된 스타일은 한국 드라마와 음악을 통해 널리 퍼졌고, 21세기 한국의 성형수술은 한국인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라는 총체적인 미적 가치를 지향함
- 인종 과학과 아시아 미인의 탄생
: 인체계측학, 디지털 모델링과 같은 기술과 과학 지식에 기대어 각 개인의 특징을 세세하게 측정해 겉모습의 차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인종화함
- K-성형 과학이 말해 주는 것
: 인종을 초월한 보편적 아름다움이 탄생하며 미인은 이제 국제적으로 통하는 기준이자,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고 의학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자질임
- K-성형 과학이 아직 말하지 않는 것
: 인종 간 위계가 사라진 세계화된 미인의 얼굴은 어떤 얼굴이 아름다운지를 말할 뿐 그 얼굴이 왜 아름다운지는 말하지 않음, 그러나 그런 설명을 해 주지 않기 때문에 과학임
2. 처음 읽었을 때 ‘전혀 관심 없는 주제라 재미없다’고 써놨었는데 ㅋㅋㅋㅋ 다시 읽은 지금도 관심 없는 주제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어. 그래도 이번에는 요약하면서 재미있게 읽었어!
성형수술이 이상적 한국인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인종을 초월한 보편적 아름다움을 탄생시키며 인종 간 위계를 사라지게 한다는 주장에 솔직히 공감이 가지 않았어. 아름다움을 꼭 수치화하고, 공통적인 아름다움의 특징들을 찾아내야 하는 걸까? 각자의 아름다움의 기준은 다르고, 모두가 각자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여기서는 완벽한 미인의 생산, 세계화된 미인의 얼굴, 보편적 아름다움 등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한다는 게 흥미롭지만 사실 공감은 되지 않았어.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형수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게 된 건 재미있었어. ㅎㅎ
Day 32 | 8/31
* 꼼꼼히 읽기:
| 이들 모두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개인적 갈등이 결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때면, 다시 고전을 펼쳐 들곤 한다. 지금까지 사회에서 추구해 온 명예, 인생의 목표였던 행복, 그리고 결코 머지않은 죽음, 이러한 화두들에 대하여 고전은 어떤 질문들을 던지고 있으며 그것이 지금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묻는다. 고전에서 단단한 토대를 찾고자 하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더욱 새로워지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욕망이다.
| 고전은 자기계발서 같은 답을 내놓기보다는 끊임없이 성찰을 요구하며 스스로 길을 찾게 만드는 텍스트다. 그래서 고전을 마주하는 것은 내 삶을 토대부터 다시 생각하게 하는 능동적인 독서 혁명이다.
* 오늘의 문장: 옛 그리스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비극에서 심각한 물음을 던졌다. 아폴론 신전에 붙어 있었고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전통적인 지혜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누구인지를 꼭 알아야만 하는가?" "그대는 그 앎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가?" (p.39)
* 한 걸음 더:
1.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반기를 들며 소포클레스가 던진 물음. 종종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을 듣지만, 사실 정말 ’아는 것이 힘‘일까? 만약 우리의 운명이 정말로 정해져 있다면, 우리의 운명이 무엇인지 꼭 알아야 할까? 또 우리는 그 앎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심지어는 나의 선택 없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삶의 요소들 중 어떤 것들까지도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얼마든지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도 좋아해. ’아는 것이 힘‘이 될 수도 있지만, 나의 미래 같은 너무나 중대한 일을 안다는 건 감당하기 버거워서 ’아는 것이 독‘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고결하게 판단하고 용감하게 실천‘이란 말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고 싶다. ㅎㅎ
2. 난 운명을 믿지 않고 내 길은 내가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설사 내 운명이라는 게 있고, 그걸 알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알고 싶지 않아. 정해진 운명에 얽매이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아. ‘내 몫에 충실하고 역할을 잘하는 것’이 꼭 운명을 따르는 길은 아니라고 생각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난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길을 만들어 나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3. 최근에 다른 독서모임에서 ‘운명을 결정짓는 만남’이라는 키워드를 보고 떠오르는 걸 소개해달라고 했었는데, 가장 먼저 셰익스피어의 『멕베스』가 생각났었거든. 극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세 마녀들과 맥베스의 만남이었는데, 마녀들의 예언을 들은 후 바로 코더 영주가 되자, 맥베스의 머릿속에는 ‘장차 왕이 되실 분’이라는 예언도 계속해서 맴돌며 결국 욕망을 못 이겨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되잖아.
이 부분에서 맥베스가 왕을 시해하지 않고도 왕이 될 수 있었을지 항상 궁금했거든. 만약 마녀들의 예언이 정말 사실이었다고 가정하면, 맥베스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도 왕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맥베스가 왕을 시해하며 왕이 될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낸 건지, 아니면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도 왕이 될 운명으로 정해져 있던 건지, 어떤 쪽일지 궁금했어.
정말로 운명이란 게 있는 거라면 내가 피하려고 하는 행동까지도 그 운명으로 향하는 길이 되는 것일 텐데, 그게 정말 참된 길일까?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잖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고결하게 판단하고 용감하게 실천한다면 내게 이미 주어진 삶의 궤적이 있다 할지라도 살면서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아.
Day 33 | 9/1
* 꼼꼼히 읽기:
| 같은 19세기 바다 건너 미국에서 에밀리 디킨슨이 좁은 집안에서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성에 대해 천 편이 넘는 시를 남긴 것처럼, 브론테도 좁은 마을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았지만 자연에 대한 경의를 무한성에 대한 감각으로 확장하는 시적 재능이 매우 뛰어나다.
| 에밀리 브론테가 희망과 생성을 노래할 수 있는 힘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들과 고독에 대한 깊은 숙고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한 은유들로 시작하여 기쁨을 향해 뻗는 시적 감수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강력한 생명력을 품게 된다.
* 오늘의 문장:
긴 하루의 근심과, 아픔에서 아픔으로
세상 변하는 것에 지쳤을 때,
길을 잃어 절망에 빠지려 할 때,
그대의 다정한 음성이 나를 다시 부른다.
오, 나의 진실한 친구여,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그대가 그런 어조로 말할 수 있는 한! (p.45)
* 한 걸음 더:
1. 상상은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아프고, 지치고, 힘들고, 절망할 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는 존재 같아.
사방이 위험, 죄,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어도, 마음에 하늘을 지니고 태양빛으로 따뜻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늘 그곳에 있으면서 환상과, 생명과, 세상을 가져오고 속삭이는 것.
희망이 절망일 때, 더 다정하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되네. 작가 본인이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언니들을 죽음으로 떠나보내는 가슴 아픈 경험을 했지만, 이 시에 나오는 구절처럼 ’죽음에서 아름다운 생명을 불러‘내 희망을 노래한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
Day 34 | 9/2
* 꼼꼼히 읽기:
| 되블린은 평범한 사람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불안하고 위태위 태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비이성적이고 모순적인 행동과 광기, 분노, 우울, 공포와 같은 심층 감정을, 정신 병원에서 근무하였던 자신의 경험을 살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 끈질기게 파고든다.
| 되블린 자신은 정신 병원에서 근무했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정신병자들 사이에서 나는 항상 몹시 편안했다. 그때 나는 내가 식물과 동물과 돌 외에 단 두 가지 범주의 사람들만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아이들과 광인들이다.”
| 대신에 되블린은 실험하는 사람이었다. 해답을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의식적인 불확실함에 대한 실험을 하는 사람이었다. 의식적인 불확실함에 대한 실험은 작가 되블린을 쉬게 두지 않았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란스러운 작품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냈다.
| “마음, 마음이라고. 마음이 준비가 됐다면, 모든 일을 다 한 거지. 오늘은 초승달이 떴어. 나는 내면으로부터 모든 걸 극복할 거야. 이미 어려운 상황을 여럿 극복했듯이. 그리고 포도즙이.”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도취경에 빠지며 엄숙해진다. “모르겠어? 포도즙이 마음에 기름칠을 하는 거야. 그러면 마음은 민첩해지고 자유롭게 뛰어오를 수 있어. 공중으로. 그곳에서 마음은 자유로워져. 마음은 그리로 뛰어오를 수 있다고. 아니면 들판으로, 아니면 감자 속으로. 어디든 뭐 아무 상관없어. 그리고 또, 그래, 엘프리데, 지저귈 수 있어, 마음은 말이야. 모두가 귀로 들을 수 있게 찌르륵거리고 지저귀고 그럴듯하게 노래할 수도 있어.” (「아스트랄리아」)
* 오늘의 문장: 신사는 큰 소리로 웃고 숨을 내뿜었다. 그러면서 산속 어두운 숲으로 사라졌다. (p.60)
* 한 걸음 더:
1. 나는 사실 처음 읽을 때도 이 단편 엄청 재미있게 읽었거든 ㅋㅋㅋ 근데 민음커뮤니티에서 이 글 반응이 대부분 불호더라고!? 나는 미하엘이 정말 미치광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상황이 계속되는데, 도대체 미하엘의 다음 행동은 무엇 일지 예측이 안 돼서 끝까지 재미있게 읽었어.
마지막에 미하엘은 다시 숲 속으로 사라지는데, 민들레꽃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기뻐하더니 왜 다시 숲으로 가는 걸까 궁금했어. 다시 살해하고, 속죄하고, 구속당할 대상을 찾으러 가는 걸까? ‘그의 삶이 그토록 생기발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라는 구절로 짐작했을 때 사실 그는 민들레꽃에게 구속되는 걸 즐겼던 거 아닐까? 이런 생각도 했었어 ㅋㅋㅋ
다시 읽으면서 키워드들을 생각하며 읽었는데, 현대인의 정신 불안, 현대인의 숨겨진 폭력성과 이중적인 심리는 그래도 찾은 것 같은데 인간과 자연의 관계, 부르주아의 위선적 삶에 대한 비판은 알쏭달쏭하네. ‘민들레꽃 살해’가 진짜인지 상상인지 미하엘 본인도 혼동하거나, 엘렌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부분, 말 없는 식물을 지팡이로 내리치는 폭력성을 보이면서 동시에 누가 보면 안 된다고 의식하는 모습 등, 이런 것들을 찾으며 읽으니 더 재미있다 ㅎㅎ
Day 35 | 9/3
* 꼼꼼히 읽기:
| 버지니아 울프는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믿는 이들에게, 인생의 먹잇감 역시 나라고 얘기한다. 가끔은 인생의 눈을 피하고 인생을 따돌려도 된다고, 그렇게 해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기를 바란다는 듯.
* 오늘의 문장: 그러나 병에 걸린 사람이 머릿속 통증을 의사에게 설명하려면 당장 언어가 고갈되어 버린다. 그가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표현이 없다. 그는 스스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 한다. (p.64)
* 한 걸음 더:
1. 나는 ‘몸은 낮이든 밤이든 끼어든다.’는 주장에 좀 더 공감이 가.
2. ‘그러나 병에 걸린 사람이 머릿속 통증을 의사에게 설명하려면 당장 언어가 고갈되어 버린다. 그가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표현이 없다. 그는 스스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 한다.’를 오늘의 문장으로 골랐는데, 난 마음의 질병만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이 글을 읽으면서 신체적 질병으로 인한 고통도 동일한 이유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 역시 타인의 아픔과 고통, 슬픔에 관해선 함부로 공감과 이해를 논하지 말아야겠어.
3. 최근에 읽은 정보라 작가님의 『고통에 관하여』라는 소설이 굉장히 많이 떠오르는 글이었어. 이런 문장들이 나오거든.
|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 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달랐다.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p.301)
| 자신의 육체가 경험하는 감각과 사고를 언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는 있으니 인간은 오랫동안 그렇게 전달하고 소통하고 공유하려 애썼으나 그 어떤 표현의 방식도 결국은 불충분하다. (p.128)
난 언어의 결핍 때문에 질병이 문학의 소재로 부적합하다기보다는, 결국엔 어떠한 표현도 타인에게 통증을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했어. 언어의 결핍보다는 전달의 한계가 더 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