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2 읽고 쓰기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사실 당일에 읽은 글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을 기본으로 하려고 하나, 오늘 생각하고 느꼈던 것이 어제 읽은 부분과 연관이 있어 어제 읽은 부분을 가져와 글을 쓰게 되었다.
어제는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 2부 삶이 진실에 베일 때의 시작 글인 '사물성, 사건성, 내면성 - 사진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을 읽었다. 문장이 정말 좋아서, 계속 생각하며 읽다 보니 어제는 그 글 한 편만 읽었다.
(...) 어떤 사진은 내면성을 수호하기 위해 시간을 멈추려는 불가능한 노력 그 자체를 보여준다. 적어도 내게는 사물성의 사진이 아니라 내면성의 사진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멈춰 있는 것(사물)을 다시 멈출 수는 없기 때문이고, 멈출 수 없는 것(시간)만이 그것을 멈추려는 노력을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면성의 사진에 대한 내 애호는 문학의 실패와는 다른 실패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리라.(114쪽)
저자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은 결론'을 통해 그의 사진 취향이 문학과 어떤 관련이 있는 지를 말하며 글을 위와 같이 마무리한다. 저자가 말한 사건성과 내면성 중 내면성에 관해 더 생각해보았다. 나는 길을 걷다가도 자주 멈춰 서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의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나중에 찍은 사진을 보면, 눈으로만 그 사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들었던 소리, 내가 맡은 향기, 내가 스쳤던 것들의 기억을 되살리며 단지 시각적으로만 사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청각, 후각, 촉각을 모두 사용해 기억을 떠올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눈으로 보는 그대로를 사진에 담을 수 없다는 게 항상 아쉽기는 하지만(대부분의 경우, 사진보다 실제가 훨씬 더 아름답다) 그래도 사진은 내게 가장 효과적인 기억 소환 장치다.
'작은 결론' 부분을 읽으며 "멈출 수 없는 것(시간)만이 그것을 멈추려는 노력을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라는 부분에서 전율을 느꼈다. 사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것을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박제해버린다. 어쩌면 내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멈출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항상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좋았던 기억을 통해 힘을 내고,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그래서 사진은 나에게 멈출 순 없지만 찰나라도 붙잡을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인지도 모른다.
혼자 햇살이 따스한, 그러나 바람은 좀 찬 오후에 창덕궁과 창경궁을 방문했다. 봄의 창덕궁은 홍매화로 유명하다. 하지만 매화를 보기엔 시기가 좀 늦지 않았나 생각해 벚꽃 구경을 기대하고 간 곳에 홍매화가 만개해있었다. 순간 마음이 부풀어 오르며 행복함으로 충만해졌다. 이렇게 만개한 홍매화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2016년부터 매해 봄에 창덕궁에 방문해 홍매화를 보는 게 연례행사같이 되었는데, 올해의 홍매화가 제일 아름다웠다. 꽃은 매해 피고 지지만, 같은 나무에서 열렸다고, 같은 자리에서 피었다고 그 꽃이 작년의, 재작년의 꽃과 같은 꽃은 아니다. 그래서 매해 같은 나무에서 열리는 꽃을 보고, 기록하는 일이 나에겐 식상하지 않고 퍽 신선하고 재미있는 일이 되었다. 물론 올해는 운이 좋아서 만개해 제일 아름다운 모습의 홍매화를 보게 된 것이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내가 그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2019년의 홍매화도, 2018년의 홍매화도, 2017년, 2016년, 아니 그보다 더 이전의 홍매화도, 그리고 미래의 홍매화도 결국 피었다 지게 되어 있지만, 내가 사진으로 기록한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선 그 홍매화는 언제나 만개해있을 것이다. 시간을 멈출 순 없지만, 찰나라도 붙잡고, 기록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