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힘

2019.05.12 읽고 쓰기 (정은귀, 바람이 부는 시간)

by bookyoulovearchive


정은귀 선생님의 <<바람이 부는 시간>>에 실린 글 '어떤 불행과 어떤 행운과 어떤 망각과 어떤 기억'을 오래도록 곱씹으며 읽었다. 미국 시를 배우며 알게 된 메리 올리버의 시 '검은 뱀'이 실린 글이었다. 메리 올리버 시인의 시를 여러 편 배우면서 '기러기'도 좋았지만 이 시도 굉장히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데, 이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이 시를 읽었던 첫 느낌을 떠올려보았다.


계속 차를 몬다. 죽음에 대해 / 생각하면서, 그 갑작스러움, / 죽음의 끔찍한 무게, / 반드시 오는 죽음. 하지만 // 이성 아래엔 더 밝은 불이 타오르고 있어, / 뼈가 항상 좋아했던 것, / 그 불은 끝없는 행운의 이야기. / 그 불은 망각에 대고 말하지. 나는 아니야! - 메리 올리버, '검은 뱀' 중 (277쪽)

갑작스럽게 오는 죽음은 엄청나게 무겁고, 또 반드시 오는 어떤 것이다. (278쪽)

(...) 여러 겹의 생각 끝에 운전자는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는 아마 뱀의 죽음을 잊고 다시 또 행복한 일상으로, 그저 그렇고 그런 오후의 생활로 접어들 것이다. 뱀은 뱀, 죽음은 죽음,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의 불꽃이 타올라 사람은 일상을 이어간다.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의 밝은 불꽃으로 우리는 죽음을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삶에 충실히 임한다. 우리는 수많은 그 죽음들을 잠시 아파하다가 곧 망각이라는 선물로 죽음을 잊고 다시 삶을 이어나간다. (279쪽)

바로 우리를 살게 만드는 어떤 힘이 또 우리의 생명을 앗아간다는 진리다. 많은 이들이 자기를 살게 추동하는 힘 때문에 죽는다. (279쪽)

그럼에도 죽음을 잊고 다시 또 산다. 망각은 이처럼 막강하다. 죽음을 넘어서 다시 살게 하니까. (...) 하지만 바로 곁에 있는 소중한 이의 죽음, 가족이라든가 친구라든가, 가까운 정을 나누는 사이에서 죽음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고통이요 길게 계속되는, 아니 평생토록 계속되는 그리움의 형벌을 남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279-280쪽)

어떤 불행과 어떤 행운과 어떤 망각과 어떤 기억이 우리를 살게 하고 또 죽게 하는가. 어쩌면 우리는 우리를 살게 하는 걸 정신없이 쫓다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닐까? (281쪽)




나도 한 명의 인간이지만, 인간은 참 신기한 존재인 것 같다. 저자가 말했듯 우리는 '죽음을 슬퍼하지만, 또 금세 그 죽음을 잊고 다시 또 하루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만, 또 금세 그를 잊고 다시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이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너무 많은 죽음, 너무 많은 아픔, 너무 많은 슬픔들을 모두 잊지 못하고 떠안다 보면 아마 우리는 그 무게에 질식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죽음이 온다고 막연하게 생각은 하지만, 막상 나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 그것도 '나의 곁에 있는 소중한 이의 죽음'은 쉽게 상상하기 힘들고, 또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정말로 이 글에서처럼 반드시 오는 죽음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끔찍하게 우리를 찾아온다.


벌써 2년이 흘렀는데,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나 친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의 쌍둥이 오빠가 정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일은 살면서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내 생일이 지나고 처음 맞는 주말 오후, 아무 생각 없이 평화롭게 누워 있다가 받은 카톡 한 통. 제발 기도해달라는 친구의 카톡에 덜덜 떨면서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제발 기적이 일어나길, 제발 무사히 깨어날 수 있기를. 하지만 끝내 우리 모두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말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친구. 아직도 그 날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문득 이 글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그 죽음을 완벽하게 망각하고 있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마도 친구의 가족이지만, 내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닌, 타인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날을 기점으로 정말 '죽음은 언젠가 반드시 오지만, 그 죽음은 언제나 무겁고, 갑작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오늘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며 최대한 후회 없이 살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연하게 나의 죽음보다 언젠가 나도 마주하게 될 내 곁의 소중한 이들의 죽음이 더 두렵다. 그때도 나는 망각의 힘으로 다시 삶을 잘 이어나갈 수 있을까? 잊지 않으면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완벽하게 잊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또 말해줄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 같다. 죽음의 비밀이 파헤쳐진다면, 그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까?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하면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