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을 순수의 상태로 인도하는 코메디아 델라르테
작성 노운아
글에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할 때 평면적인 인물보다는 입체적인 인물이 갈등 구조를 명확히 만들고 이것이 독자의 관심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배웠다. 꼭 전문적인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전형적인 인물보다는 다양한 면을 가진 인물이 작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 연극,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입체적으로 진화됐다. 옛 작품을 뒤돌아 관람할 때마다 그러한 부분을 더욱 명확히 관객으로서 느끼곤 한다. 물론 이렇게 전형적인 인물의 등장은 관객이나 독자로서 마음이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기도 하다. 이런 전형적인 인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자체가 요즘에는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입체적으로 인물의 성격이 변한다는 것은 갈등을 향해 나아가는 전차와도 같은 것이고 어느 특정 인물의 성격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아울러 주변 인물들도 복잡해지는 전개에 따라 입체적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야기는 한층 복잡해지고 갈등은 더욱 파괴적인 힘을 가진다. 아울러 관객은 극에 매돌 돼 환호하게 된다.
이번 명동 예술 극장에서 공연한 ‘스카팽’은 몰리에르 희극을 올린 무대이다. 본인은 연극을 꽤 많이 관람했다고 생각했는데 당황스럽게도 몰리에르 연극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장주네,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셰익스피어, 페어귄트 그리고 이번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페터 한트케 등 주로 관람한 연극을 곱씹어 보니 고전극에서도 비극을 관람하거나 현대극에서도 작가주의나 표현주의적 요소가 강한 연극을 대체로 관람했다. ‘왜 그랬을까’라고 자문해 봐도 그 대답은 ‘나도 잘 모르겠다’이다. 그래서 이번에 그 이유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해 봤는데 몇 가지 그럴듯한 이유가 내면에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본인은 대학로에서 연극이라는 이름을 빌려 자행되는 개그 범벅 공연쇼에 엄청난 알레르기가 있고 괜찮은 연극이라도 마지막 공연이나 극 후반부에 배우에 의해서 충동적으로 벌어지는 애드리브에도 꽤 부정적이다. 말만 연극이지 이상한 잡쇼라는 생각이 많이 들기도 했다. 더러는 연극인 것 같기는 한데 영화나 뮤지컬적인 요소를 넣어서 제작하는 연극도 꽤 많다. 대부분 망해가는 연극판에서 힘들게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일환으로 관객을 잡기 위해서는 재미가 필요하고 그 재미를 무엇으로 대체해 볼까 하는 고민의 결과로 ‘그저 그런 개그’가 삽입된 것 같다. 개그맨이 개그를 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문제는 연극에서 그러한 이해 불가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라서 ‘재미있는 연극’ ‘우스꽝스러운 연극’이라는 타이틀이 계속 대학로에 걸려있는 것 같다. 그 ‘가볍고도 금방 사라지는 재미’는 ‘코미디’와도 다르다. 배우의 언어유희에서 오는 유쾌함, 단련된 신체로 몸을 스스로 조련하는 서커스 단원 같은 연극 배우의 슬랩스틱,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림 없이 터져 나오는 완벽한 딕션, 아름다운 화성 같은 음성. 한참 웃고 나면 문득 심각해지는 표정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대사. 이러한 것들은 본인이 ‘코미디’라고 확신해서 정의를 내릴 순 없지만 ‘코미디’라는 것을 들을 때 필자에게서 생각나는 것들이다. 이러한 ‘코미디’를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이 한국에서 연극을 관람할 때는 코미디든 희극이든 피하게 됐고 궁극적으로 한쪽에만 치우친 편식 관람을 자행하게 됐다.
드디어 몰리에르의 ‘스카팽’을 관람하게 됐다. 사실을 고백하건대 이것도 꽤 안타까운 이유가 있었다. 요즘 외국 작품이라 해도 계속 국내의 정치적인 상황과 결부해서 해석하려는 증상이 명동 예술 극장의 연극에서도 점점 심해지고 있으며 더욱 심각한 것으로는 날이 갈수록 그 작품 연출 수준 또한 떨어지고 있는 명동 예술극장의 연극을 피했다. 자연스레 비극과 외국 작품을 피하다 보니 얻어걸린 것이 몰리에르의 ‘스카팽’이었다. 일단 티켓팅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먼저 스카팽의 간단한 줄거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원제는 ‘Les Fourberies de Scapin’으로 ‘스카팽의 간계’나 ‘스카팽의 거짓 놀음’으로 번역 돼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스카팽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본 연극에서는 두 가족이 이야기의 축을 이룬다. 한 가족은 아르강트와 옥타브 그리고 다른 한 가족은 제롱트와 레앙드르이다. 두 쪽 모두 부자지간이다. 두 가족의 아버지 아르강트와 제롱트는 재력이 있는 집안이고 이러한 집안이라면 으레 자식들 결혼에도 관심이 지대할 법이다. 이 연극이 1671년에 집필됐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결혼에 있어서 부모의 관심은 유효하다. 제롱트는 재혼한 새 부인의 딸을 아르강트의 아들 옥타브와 맺어주려는 계획이 있었다. 아르강트 또한 돈 많은 집안 제롱트와 사돈 맺는 것을 계획한다. 그렇지만 두 아버지의 아들들 옥타브와 레앙드르는 서로 다른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고 마침내 부모 몰래 결혼을 하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두 아버지는 곧 실행에 들어간다. 아르강트는 옥타브에게 제롱트의 딸과 결혼을 시키려고 하지만 옥타브는 이미 사랑하는 여인 아이생트 때문에 다른 여인과 결혼할 수 없다고 한다. 사실 옥타브는 아버지 아르강트를 무서워 하는 아들이다. 그렇지만 거대한 산과 같은 돈 많은 아버지도 그의 사랑 앞에서는 아무 존재도 아니었다. 이런 나약한 용기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의 힘도 있었겠지만 꾀와 모사에 능한 스카팽의 부추김도 존재했다. 옥타브는 스카팽에게 어떻게 하면 아르강트의 강권에 맞서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할 수 있는지 이 사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한다.
레앙드르 또한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부모 제롱트 모르게 사귀는 여자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제롱트는 사둔이 될 뻔한 아르강트와 함께 옥타브의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된다. 제롱트는 아르강트에게 옥타브의 행실에 대해서 가정 교육에 관한 이야기로 아르강트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에 아르강트는 스카팽을 통해 들은 옥타브보다도 더 큰 잘못을 저지른 레앙드르에 대한 이야기를 제롱트에게 이야기한다.
위의 스토리가 사건의 발단이라고 볼 수 있다. 스카팽은 레앙드르와 옥타브의 곤란을 간계와 거짓으로 마치 해결사처럼 해결해 주려고 하고 이를 통해서 돈을 얻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돈 많은 두 아버지한테 감언이설로 돈을 뜯어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돈을 갈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협박을 사용하는데 협박을 통해 두 아버지가 아들들의 결혼을 허락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 전개만 보면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 구조다. 그리고 이렇게 서술문으로 옮겨 적으니까 그 전형성이 더 부각 돼 보인다. 막장 드라마의 인기 요소처럼 김치 싸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MSG가 있어야 할 법도 한데 사랑을 위해 아버지와 맞서기 위한 수단이 스카팽의 간계 정도라니 하품 나올 법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 연극은 ‘코메디아 델 아르테’이다. 그것은 생기발랄한 웃음과 과장, 엉뚱함, 대사를 반복하거나 사투리를 써서 불러일으키는 웃음, 배우들의 유연한 연기술이 특징이다. 대사도 장황해서 협박을 하러 가는 상황에서도 스카팽은 말을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듣는 이를 헷갈리게 하거나 꼬임에 빠지도록 한다. 억지 수긍을 유도해 내는 말재간이 지금으로 보면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돕는 장치로 활용된다. 21세기 최첨단 유행을 선도하는 명동에서도 이것이 통했는가라는 질문에 본인은 확신하면서 대답한다. 100프로 통했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 심지어 소설까지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왜 이렇게 다들 반전에만 집중하는가이다. 플롯이나 장면이 어떤 반전을 위한 장치 정도로만 설계된다. 이를 통해 작가의 천재성을 확인하려 하는지 무엇인지는 본인은 별로 관심도 없지만 이것은 분명 SNS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에서 잘 통하는 이야기 구조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반전만을 위한 이야기 구조가 활개 하는 현시점에서 반전도 없고 통속적이며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의 ‘스카팽’이 더욱 재미있게 느껴졌다. 아무 생각도 없이 연극을 보는 순수한 관객으로 그만 태어나고 말았다. 이런 카타르시스를 제법 오랜만에 경험했다.
이제 극은 본격적인 갈등으로 향한다.
제롱 트는 아르강트한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해서 당장 레앙드르를 부른다. 아버지를 모욕한 것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고 사라졌다. 레앙드르는 스카팽에게 괘씸함을 느꼈다. 촉새처럼 자신의 비밀을 제롱트에게 이야기한 것에 분개했고 스카팽을 죽이려 든다. 이 부분이 굉장히 재미있는데 스카팽은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면서 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따진다. 레앙드르는 스카팽을 취조하지만 스카팽은 협박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얄밉게 그리고 상대를 놀리듯 자신이 저지른 전혀 다른 과거의 일을 고백한다. 그 고백이 관객의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이때부터 관객은 쉴 새 없이 웃는다. 아닌 사실을 고백한 할 때마다 레앙드르의 위협은 과장된 몸으로 연출되고 스카팽은 봐 달라는 불쌍한 표정을 지어내면서도 상대를 약 올리는 재간둥이처럼 연기를 탁월하게 해낸다. 배우의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미끄러지는 유연한 연기에 관객은 자지러진다.
결국, 스카팽은 레앙드르와 옥타브의 간곡한 협박으로 이 일을 결국 돈으로 해결하려 들며 그 자금의 출처는 스카팽의 꾀를 이용해서 부유한 아버지로부터 돈을 갈취해 내는 것이다. 물론 스카팽은 그 임무를 완성해 냈고 그 대가로 자신을 모욕한 제롱트를 몽둥이로 때려서 복수까지 끝낸다. 몽둥이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도구이다. 즉 이것을 몽둥이 찜질이라고 한다. 폭력적으로 짓밟는 것이 아니라 과장된 도구와 흥분된 우스꽝스러운 배우의 대사가 무대 위에서 뒤엉키면서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재미는 절정으로 치솟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벌린 연극은 어떻게 몰리에르가 마무리 지었는가. 이 부분에서 관객이라면 김새는 결말에 금방 냉담해 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계층 간 갈등에 대해서 오르려는 욕망과 추락당한 절망이 뒤섞인 현재, 이런 세상에서 몰리에르의 결말은 어쩜 대중의 얼굴을 향해 직접 찬물을 끼얹는 것일 수도 있다. 왜 이런 예상을 하느냐면 결말은 두 아버지가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이생트는 사실 사별로 헤어진 제롱트의 첫 부인에서 얻은 딸이었고 제르비네트는 어렸을 때 헤어졌던 아르강트의 딸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두 딸의 출신 성분이 급상승 됐다. 작가가 글을 다소 쉽게 마무리 짓고 싶을 때 쓰기에 매우 유혹적인 이야기 구조다. 즉 두 여인은 급작스럽게 고결해지면서 두 아버지의 노여움은 빨리 해소된다. 지금 관객이 느끼기엔 어쩌면 무책임하기까지 한 결말이다.
그렇지만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야기 구조의 개연성이나 논리적인 구조에 집착하기보다는 이야기 구조 외 인물들의 희극적 연기, 대사, 상황과 과장된 이야기 전개에 더욱 집중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갈등으로 인해서 한순간에 탄식을 내지를 관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유쾌하게 끝날 수 있도록 두 여인의 출신이 마술처럼 변경된 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됐다. 왜냐하면, 스카팽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 유쾌한 꾀에 관객은 너무 순순해졌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스카팽의 전형적인 성격도 진부라고 단순히 치부하기보다는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했고 이야기를 사실적인 개연성에만 집중된 현재의 이야기 홍수 속에서 관객은 순순히 설득당했다. 정치적인 견해, 인생의 사색과 고뇌, 엄중함 등 연극이라면 지어야 할 무릇 무게가 스카팽에서는 강요되지 않아도 됐다.
순수해졌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 경험인지 단언한다면 그것은 메리 크리스마스 벽난로 아래에 달린 양말에 산타 할아버지가 두고 간 선물과 비슷한 존재이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선물 그리고 산타의 허구를 깨닫기 전에만 느낄 수 있는 꿈의 세계. 순수해졌다는 것은 그런 의미로 비교해볼 수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 표현 또한 꽤 진부 해지고 전형적으로 돼 버렸다. 그렇다. 그러한 것이다. 어렵게 해석할 필요도 없고 이 이야기 구조가 요즘 세태와 달리 매우 허술하다고 느낄 법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요즘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들이 얼마나 다면적이고 지나치게 세련되기까지 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번 몰리에르의 ‘스카팽’을 보고 나서 느낀 점은 연극이 왜 꼭 스크린이 없는 무대에서 상연되어야 하는가, 왜 현란한 카메라 기술이 없어도 지금까지 존재하는가와 같은 꽤 당연한 질문을 생각해 봤다. 역시 그 답은 오늘 이 감상문의 제목처럼 무대가 누구든 ‘순수’해 질 상태로 인도되는 순례자의 길, 그 초입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