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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밍북 Dec 29. 2018

빚 있는 능력 좋은 21세기형 여성

인형의 집 감상_읽는 연극 8화 

작성 노운아 (盧韻芽)


  몇천, 몇억의 빚을 두고 어떻게 생활을 할까. 

  먼 나라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청춘의 시기가 있었다. 수많은 돈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참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나는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 빚은 좋지 않은 것, 빚은 대체로 나보다 재력이 있는 남자가 안고 가는 것, 빚에 관해서 얇은 사유만이 존재했다. 어쩌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여자가 억척스럽게 홀로 가게를 꾸려가거나 생계를 위해서 장사를 하는데 빚을 안고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들. 먼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런 큰돈을 지고 단 하루도 못 버틸 것 같은데. 자연히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한 직장인이 됐고 달콤한 연속극이 선사하는 내용처럼 백마 탄 왕자는 아니더라도 실장님이나 본부장님 같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아 적어도 남자는… 어떤 형상을 그리고 있었다. 

 

  본인이 기억하는 돈에 관한 직장 초반 때 생각은 저러했다. 그 이후로 어떻게 생각이 흘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신용카드를 발급받아서 기분이 좋았던 날도 잠깐 어느 날 현금 지급기에서 보물처럼 나타난 수십만 원 지폐를 보고서 흥분했던 기억. 알고 보니 이것은 신용에 굉장히 좋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그때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또 한 달이 지나면 돌아오는 카드 청구서. 신용카드가 앞에 붙은 신용의 뜻을 점차 알아가면서 동시에 나의 나이도 점점 서른을 향해 가더니 곧 서른을 넘어서 버렸다. 퇴근 후에 보던 연속극도 주말에 만나는 친구의 모임 빈도도 자연스레 낮아졌다. 점차 혼자 생각을 서성거리며 빈방에서 움직이지 않더라도 어딘가로 무한히 질주하는 외롭고 서글픈 날들이 이어졌다. 

 신용을 담보로 작은 빚이 내 앞에 쌓였고 그것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지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빚은 나보다 당연히 벌이가 좋은 남자가 안고 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자 그만 나는 보기 좋게 노처녀가 돼 있었다. 이제는 무엇이라도 해야지. 인생이 내 마음처럼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 깨달아도 너무 일찍 깨달은 본인을 위로하면서… 자책과 힐책이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나 몰래 빚? 빚을?” 

   헬머의 비명이 무대에서 찌릿했다. 

  은행장이 된 헬머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종달새인 노라, 귀여운 자녀들 그리고 꽃길이 보장된 수입과 지위가 그를 에워쌌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지난달 힘들었던 시절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됐다. 

  그렇지만 헬머가 모르고 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이런 망할 일이라는 것이 왜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의 초점이 결국 노라에게 향했다. 노라가, 노라가 남편 몰래 빚을 지고 심지어 문서까지 위조하다니. 노라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남편에게 이야기했지만 소용없었다. 헬머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순종적인 종달새가 이런 파렴치한 일을 꾸미다니, 그는 검게 변했다. 그리고 노라를 모욕하기 시작했다. 


  “모두 무책임한 여자 때문이야!” 

  이제 헬머는 더 이상 행복을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자신은 이 일이 발목이 돼서 협박을 당할 것이고 멸시와 모욕적인 말을 노라에게 던졌다.      


  본인이 이 연극 대본을 접한 20대 중반에도 헬머처럼 나는 헬머와 노라가 처한 상황에 기가 막히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이것이 과연 진노를 부를 만큼 큰일일까 하는 모호한 생각이 들었다. 헬머도 노라도 그 어느 편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신용사회에서는 살고 있지만 신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본 연극이 처음 발표된 1879년보다도 더옛날에 살고 있는 19세기형 여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스무고개 넘듯이 차곡차곡 넘어서서 드디어 삼십 대에 접어드니 헨릭 입센의 인형의 꿈이 싱거운 작품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머리로 읽고, 상식으로 누군가에게 보이려고만 했다. 작품에 관한 진솔한 이해와 감동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게 여주인공 노라처럼 본인을 종달새라며 칭해주던 능력 좋은 남자 또는 남편도 없었을뿐더러 또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불가피하게 서류를 위조해가면서 돈을 융통해야만 하는 극적인 순간도 없었다. 오히려 저런 능력 좋은 남편이 결국에는 용서해 주지 않았는가 하는 반문을 제기하면서 노라를 이해하지 못했다. 

  씁쓸함을 안고서 본인은 이제 드라마에서나 그리던 남자는 만날 수 없을 거라는 것과 한편으로는 이 월급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포기의 상태에서 나는 슬그머니 은행의 반짝 거리는 대리석을 힐끔 쳐다보았다. 내 얼굴이 비칠 것 같은 대리석. 그렇게 어렵게 방문한 곳에서 나는 합법적으로 빚을 구하려 한다. 노라처럼 감히 여자가 어디 남편 몰래 빚을 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나는 남편이 없지만. 

 두근거리는 심장. 

 빚은 항상 좋지 않은 것이라고만 여겼는데. 막상 집 한 채를 구하려면 빚 없이는 언감생심이었다. 이제 빚은 꼭 필요한 것이고 빚을 낼 수 있는 허락만 떨어지면 나는 당당히 빚이 있다고 소리칠 수 있으리라. 물론 나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였다. 노라는 남편을 구하기 위한 빚이 과정은 온전치 못했지만 융통할 능력을 발휘해서 가정을 지켰다. 노라는 숨죽여야 했고 이것이 모두 해결이 되려던 순간에 모든 것이 조각나 버렸다. 온전한 가정을 지킨 대가에서 얻은 것은 남편 헬머 기저에 깔린 속마음을 모두 목격한 것이었다.


  처음 헨릭 입센의 작품, ‘인형의 집’을 만났을 때는 이십 대 후반이었던 것 같았다. 사실 헨릭 입센을 작품으로 만난 것은 2005년 독일에서 필자가 잠시 어학연수로 Bochum에 머물렀을 때 봤던 공연, Peer Gynt을 통해서였다. 아직도 그 여름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연극이라는 것을 너무도 좋아했던 그 시기를 나는 두 편의 문학 작품의 감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18번에서 찬미한 누군가의 시가 된다는 시구에 놀라 벅찬 감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순간 그리고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을 때 연상되는 청춘의 빗 가락, 마치 왕창 내리다가 갑자기 푸른 하늘이 선사하는 녹음의 풍경을 따라 마주하는 노을의 빛이 머무는 순간, 그것이 연극과 관통했다. 대학교 1, 2학년 때였다. 

  독일에서 우연히 알게 된 지인의 초청으로 나는 헨릭 입센의 공연을 주말 저녁에 관람할 수 있었다. 독일어가 서툴던 시기였지만 공연을 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본인의 부족함은 금방 잊어버릴 수 있었다. 연극은 연극이겠거니 하면서 낯선 사람의 무리에서 눈에 띄는 이국적인 소녀처럼 멍하고 흐릿한 표정의 말미에 포착되는 frenzy한 감흥을 볼에 감추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하다. 기묘하다. 기괴하다. 

 대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등장하는 인물이 이상했다. 


  본 연극을 연출한 유리 부투소프의 연출은 헨릭 입센의 부조리극과 비슷한 정취를 뿜어내면서 움직였다. 인형의 집은 부조리극이 아니다. 노라가 원작품에서처럼 헬머가 부르는 종달새처럼 오롯이 수동적인 분위기를 품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지점에서 노라와 헬머가 역할을 바꿔서 헬머가 노라를 노라가 헬머를 연기하였다. 

 독일에서 봤던 연극처럼 연출 유리 부투소프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은 때론 기괴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21세기로 넘어와서 유행하는 걸크러쉬의 인상을 물씬 풍기며 노라가 헬머의 역을 하면서 헬머의 말을 쏟아내는 연출력이 돋보였다. 요즘 표현으로 치자면 사이다 같은 장면이었다. 그렇지만 고전극에서처럼 헬머가 노라에게 쏘아붙이면서 남녀평등에 관한 문제를 부각하기 위한  즉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독살스럽고 모욕적인 느낌이 반감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노라가 독백하는 장면과 크리스마스를 연출한 장면이었는데, 러시아 출신이라는 배경이 작용해서 그런지 슬라브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연출자의 연출력과  대본으로 접한 고전 인형의 집을 읽고 필자가 상상했던 이미지와 충돌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고전극은 재미없고 시대에 뒤떨어졌을 거라는 대중의 불안을 깨끗이 불식했다는 점에서 좋은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미래의 남편에게 집을 구하느라고 빚이 있다고 한다면 그가 나에게 헬머처럼 감히 여자가 어디 빚이 있느냐고 이별을 고할까. 인형의 집을 관람하고 나서 나는 예술의 전당을 내려오는 길에서 등이 뜨끔거렸다. 나는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고 물론 합법적으로 은행이라는 창구를 통해서 빚을 승인받은 신용이 나름 괜찮은 여성이다. 그런데도 내 내면에서는 그런 당당한 빚의 존재를 숨기고 싶고 마냥 노라가 처음에 헬머에게 했던 종달새처럼 그렇게 귀엽고 상냥하게만 보이고 싶은 욕구가 계속 드는 것은 왜일까. 빚을 질 수 있는 능력을 함부로 어필해서도 안 되고 빚이 있음을 경거망동하게 발설해서도 안 된다. 빚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모습을 가지며 애교 많은 여성으로서 현모양처로 발돋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본인을 짓누른다. 이제 청춘 드라마나 로코 드라마는 내 취향이 아닌 것이 돼 버렸다. 그런 드라마의 달콤하고 푹신한 것이 좋지만 금방 숨겨 둔 빚이 나를 조종하면서 현실적인 것을 드라마에 대입하면서 판을 깨곤 한다. 

 아, 이제 달달함은 끝이다. 다음 달 빚 청구서를 위해 나는 이번 달 얼마큼 노력해야 하나.      


 노라는 집을 떠났다. 헬머가 용서를 한다며 전지적 신의 입장에서 엄숙하게 명령하지만 그녀는 집을 떠났다.      

 21세기를 사는 여성이라고 거창하게 떠들었는데 과연 본인은 사건이 해결된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노라처럼 독립적으로 짐을 꾸리고 남편에게 마지막을 고할 수 있을까.  빚을 진 비밀, 그러다가 그것이 탄로 났을 때의 남편 탄식, 복잡한 상황이 모두 해결된 상태에서 부인은 남편을 정말 등질 수 있을까. 인내와 참을성이 최고라는 정신 수련의 문제로 덮으면서 결혼 생활을 이어가지 않을까 하는 결론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지만 과연 본인은 그것을 명확히 실행해 나갈 수 있으려나. 


 1879년 남자 작가 헨릭 입센(Henrik Ibsen)이 던진 이 화두를 우리는 계속 생각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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