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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밍북 Nov 16. 2021

낭만은 오롯이 남성의 전유물

윤무(Reigen) 아르투어 슈니츨러 (Arthur Schnizler) 

 당신에게만 강요되는 사랑은 있고내가 감수해야 할 사랑은 없다

  -어떻게든 힘닿는 데까지 내통을 주워 먹어야 할 이유다.-      


                                                                                                        작성 노운아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연극을 보러 가지 못했다. 저 멀리 북쪽 나라, 그 나라의 바닷물 색깔이 대낮에도 어두웠다. ‘페어 귄트’, ‘인형의 집’을 집필한 극작가의 나라, 노르웨이. 음울한 바닷물 색이 극장 내부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상상의 나래로 빠지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내게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던 잔인한 대 코로나의 시대가 도래했다. 마스크를 쓰고 극장에 가 볼 법도 했지만 처음 마주하는 이 현실이 막막했고 혹시 내가 코로나에 걸려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불안감이 나를 방 속 깊은 곳으로 누르고 또 눌렀다. 원래 집을 좋아하는 본인이 더욱 집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부작용으로 작용돼 집을 혐오하기에 이르렀다. 양성과 양성이 만나거나 음성과 음성이 만나면 항상 역효과가 나기 마련이다. 음양의 조화를 이 시기에 절감했다. 

  오롯이 텍스트로 무대를 상상해야 하는 이상한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 

 사랑하는 이가 있을 때도 사랑하는 이가 없을 때도 이렇게까지 갑갑하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이가 없을 때는 극장에 가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사랑하는 이가 있을 때는 같이 연극을 관람하면서 일어나질 않을 사랑의 이야기를 상상하기도 했었는데. 그 어떤 사랑의 형태를 상상할 수 없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자 시간의 흐름도 잊고 공간의 개념도 잊게 됐다. 이렇게는 못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만히, 그러니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으로 걸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 오후 한 시면 어김없이 지나가는 곳은 강남역 교보문고였다. 마치 그곳이 스웨덴 근교에 있는 어느 공원의 안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곳은 좁은 회양목 울타리로 만들어진 미로 같은 정원이었는데 햇살은 눈부셨고 사람은 없어서 한가했다. 궁정 극장이 있는 곳에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든다고 상상해 봤다. 눈앞에 보이는 분홍, 보라의 향연. ‘지만지드라마’에서 출판한 연극 대본집.      

 어쩜 오늘의 글은 그동안 내가 추구해왔던 고고한 미학적인 텍스트와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든 가볍고 값싼 텍스트를 생산해낼 것인지에 대해서 벌써부터 구상 중이다. 할 수 있는 한 마음껏 본능적으로 써 보기로 노력해 본다.      


   윤무, Reigen. 손을 잡고 둥글게 춤을 추는 춤의 일종이다.      

이미지 출처: https://www.mariasainzrueda.de/03-reigen/

   이 작품을 쓴 작가는 ‘아르투어 슈니츨러, Arthur Schnizler’로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오스트리아 하면 ‘왈츠’로 유명한 곳 아닌가. 낭만적 사랑의 이야기를 상상하고는 대본을 펼쳤다. 첫 이야기는 ‘창녀와 군인’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셰익스피어의 희극에 빠지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가 사랑의 상상이고 그 상상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낭만 그 결정체이다. 애석하게도 낭만은 오롯이 남성들만의 것이리라, 나는 이제 그것을 깨달았다. 그저 나는 그 낭만의 어항 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감사할 뿐 왜 낭만적인 이야기는 내게서 불타오르지 않는가에 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왜 내 안에서 타오르는 사랑의 이야기는 모두 고통, 상처, 머저리 같은 것들이었을까 하는 의문점도 다 해소됐다. 낭만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성의 전유물이다. 이런 내가 사랑 앞에서 낭만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낭만을 이끄는 순수한 리더가 되고 싶은 열망이었으나 이건 일본에서 여자가 천황이 될 수 있을까 와 같이 거의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에 가까운 소망이었음을 지금 알게 됐다. 나는 수동적인 여성도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낭만은 정말 남자만의 것이었다. 왜 나는 이것을 깨달았을까. 사랑의 참극이 항상 고통이었음을 체득한 뒤에 참 빨리도 깨달았다고 자학했다. 따라서 깨달음은 현실이었지만 이렇게 된 것 어찌할까. 나는 더욱 연극 감상에 몰두했다. 연극에서의 사랑은 현실이 아니더라도 현실에서 맛볼 수 있는 만나여서 더욱 셰익스피어의 희극에 집중했다. 뭐, 몰리에르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윤무’에서는 이러한 나의 상상을 좀 깨뜨리는 장면으로 시작됐는데 당황했지만 나는 좀 기대를 했다. 궁극적으로 ‘윤무’는 ‘낭만’은 오롯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깨달음을 더 명확하게 만들어준 슬픈 작품이 되었다.     

 

   창녀와 노닥거리던 군인이 어떤 순수한 소녀와 또 사랑에 빠질 것이다. 이렇게 기대하고는 다음 장 이야기로 넘어갔다. 첫 번째 이야기가 너무 시시하고 짧게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군인과 방 청소하는 하녀’의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아까 첫 번째 이야기에 등장한 군인이 이번에도 또 똑같은 군인인가? 뭐 두 번 정도의 일탈이야 그럴 수도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로미오는 줄리엣을 만나기 전에 로잘린 때문에 방황을 하지 않았던가. 로미오는 ‘윤무’의 초반에 나오는 군인보다는 양반이었지만 어쨌든 군인도 같은 남자니까 이제 곧 줄리엣과 나누었던 달콤하면서도 격정적인 사랑의 깨달음을 느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방 청소하는 하녀와 젊은 남자’ 

 연극을 읽는 재미는 연극의 무대 구성을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만 詩보다 더 詩같은 대사를 읽으면서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서의 화학 작용이 일어나 궁극적으로 독자를 카타르시스와 황홀경으로 이끄는 성스러운 순례를 경험하는 일이다. 그런데 ‘윤무’의 텍스트는 이러한 것을 이끌지 않았다. 내가 가지려는 상상, 갖고 있었던 상상을 깨뜨리며 내가 가까이하기에 꺼려했던 여자들: 그들은 가을밤에 퍼지는 밤나무 냄새를 지독히도 좋아하는-을 추억하게 하는 회상의 인도자가 됐다.      

 -----------------------------------------------------------------   이 선은 무엇이지?     

 

   세 번째 이야기에 이르러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 밤나무 냄새를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는 여성이었다면 단박에 눈치챘을 텐데. 두 남녀의 정사, 내통하는 장면을 작가는 저렇게 처리했다. 참 빨리도 깨닫는 자신을 마주했을 때, 왜 남자들이 내게 상처만을 주고 떠났을까 하는 당연한 결과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세상에는 후각이 뛰어난 한 마리의 여우가 되리라. 그리고 연극 텍스트를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좀 다르게 접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녀와 젊은 남자가 내통하는 것이 전부인 이야기였다. 그사이 제삼자 때문에 산통이 깨지고 만다. 그러나 하녀는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다가 정사의 중간에서도 싫은 듯 거부를 하지만 결국 산통이 깨진 상황에서도 먼저 다가가는 것은 하녀였다. 젊은 남자는 처음과 달리 타이밍이 맞지 않은 상황에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가는데 그건 다음 이야기의 젊은 여자와의 내통을 위한 것이었다.      

-------------------------------------------------------------------  (지금은 내통 중) 

    

  네 번째 에피소드는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이야기이다. 하녀를 하대하고 마지막 최소한의 배려도 없던 그가 ‘젊은 여자’와의 정사를 위해 열렬히 구애하는 장면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어떤 깨달음을 느꼈다. 현현顯現, Epiphany. 앞서 내가 연극을 사랑했던 건 경험하고 싶었으나 경험하지 못한 낭만적 사랑의 대리 체험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그것과 흡사 비슷한 느낌을 기대치 않은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느끼게 됐다. 두 남녀의 대화를 한번 읽어 보면 이렇다.      

  

“젊은 남자: 삶이란 이렇게 공허하고 이렇듯 허무하고 -그리고-이렇든 짧고- 이렇듯 끔찍  할 정도로 짧지!  단 하나의 행복만 있을 따름이지…. 사랑해 줄 사람을 발견  하는 일-”      

 

  앞의 두 이야기를 건너뛰고 바로 이 이야기부터 내가 읽었다면 분명 나는 또 정신이 혼란하여 ‘젊은 남자’의 대사에 황홀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낭만적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낭만으로 범벅된 사람이라고, 또 내가 일전에 만났던 여러 가비지(Garbage): 쓰레기라는 말보다 나는 이 콩글리쉬 발음의 가. 비. 지가 마음에 든다-들은 거짓말이라도 저런 소리를 읊조리지 못했을까 하면서 환호하고 텍스트와 사랑에 빠졌을 텐데 어쩐지 오늘의 그 낭만적인 텍스트는 나를 암울하게 했다.      


“젊은 남자: (그녀의 손을 잡고서) 난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으며,  당신은 내게 있어 세상의  모든 행복을 의미하오.  당신 손에 하는 이 키스는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여성들에게 하는…어떤 다른 애무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한다면…. 에마, 나는 치근덕대는 다른 젊은이들과는 달라-어쩌면  난 천진난만하다고나 할까…”     


  이 대사는 낭만과 내통의 중간에서 촐랑대는 발정 난 물고기 같은 대사라고 여겨지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젊은 남자’는 낭만적이다. 내가 그렇게도 집착한 낭만의 실체가 발가벗겨져 이제 슬슬 내 앞에 나타나는 시점인데도 나는 아직도 그 단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눈치는 부대찌개에 맛있게 비벼 먹느라고 잃어버린 것인지. 이런 나의 성향 때문에:지독히도 몽상가적인 기질로- 어쩌면 착했을지도 모를, 정말로 내게 낭만을 보이려던 남자들이 질려서 떠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이라. 아, 물론 그 남자들의 폭력성과 잔인함까지 이해할 생각은 없다.      


  ‘젊은 여자’는 결혼을 한 정숙한 여인이다. 정숙한 여인은 낭만이 가득한 ‘젊은 남자’ 앞에서는 촐랑대는 열대어일 뿐이다. 일본 가수가 부른 ‘외로운 열대어’ 노래가 문득 생각난다. (Wink의 淋しい熱帯, 외로운 열대어)

이미지 출처: 나무 위키

   다소(?) 낭만적인 ‘젊은 남자’를 달래며 남편에게 돌아가는 ‘젊은 여자’와의 내통이 사랑으로 변모되고 그 사랑의 끝자락에서 남자는 자신이 감내해야 할 사랑의 무게를 ‘천국’이었다는 말로 대신한다. 천국이 내 눈앞인데 사랑의 무게쯤이야 다 감당할 것처럼 그는 낭만적인 남자가 돼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마지막 대사를 읊조리며 이야기를 막을 내린다.      


 “젊은 남자: (혼자 남는다. 다시 안락의자에 눕는다.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정숙하다는 여자랑 관계를 하고 있군.”      


   ‘젊은 여자’는 ‘젊은 남자’에게 본의 아니게 사랑을 강요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젊은 여자’가 감내해야 할 사랑은 전혀 없다. 그저 재빨리 주워 먹고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도망가면 그뿐이다.      

 

  네 번째의 에피소드는 젊은 여자와 남편에 관한 이야기다. ‘젊은 남자’가 자신이 정숙하다는 여자랑 관계한다고 중얼거리는 부분과 연결이 된다. 사실 ‘젊은 여자’는 남편이 있는 여인이었고 이 남편은 자신의 부인이 정령 정숙한 여인이라고 믿고 있다.      


 “남편: 당신이 그런 여자들하고 교제를 하지 않으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당신이… 우연히 그럴 수도 있소. 소문이 좋지 않은 바로 그런 여자들이 정숙한 여자들의 모임을 찾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지. 일부는 자신이 부정한 티가 나지 않게 하려고,  일부는…. 어떻게 말해야 하지…. 뭔가 미덕에 대한 향수 때문에.”      

 

  결혼 생활의 정숙과 도덕성을 요구하기만 하는 이 남편은 도통 매력이 없어 보인다. 낭만이 남자만의 전유물이라고 앞서 설명했지만 이런 종류의 남자들은 낭만도 없고 오직 식욕과 성욕만 넘쳐나는 노(No) 매력 보수주의자들이다. 사랑의 순수성만을 강조해서 여자를 학대하는 부류라고 생각한다.      


 “남편: 부탁이오. 그 일에 관해서는 말하지 마오. 그 모든 것은 오래전에 지나간 일이오. 나는 단 한 여자만을 사랑했소. -그게 바로 당신이오. 사람들은 순수함과 진실이 있는 곳에서만 사랑을 하지.”      


  이 말을 통해 ‘젊은 여자’의 운명은 뒤바뀌게 되고 만다. 앞서 ‘젊은 남자’를 만나는 ‘젊은 여자’에게는 감내해야 할 사랑이 없을뿐더러 내통하는 정사만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젊은 여성’은 ‘남편’에 의해서 순수한 사랑을 강요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바로 뒷이야기에서 남자는 어린 소녀와 내통을 하는데 그녀에게 구애할 때 하는 말들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낭만적인 대사들이 꽤 보였는데, 물론 그 남자의 외모를 상상해보면 역겹기는 하지만. ‘윤무’는 바로 이런 내통하는 사랑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써 내려가고 있다.      


 7. 귀여운 소녀와 작가

 8. 작가와 여배우 

 9. 여배우와 백작 

 10. 백작과 창녀      

 

   나를 참 가엽게 보던 한 여인이 생각났다. 그녀는 유능했고, 적당히 성형도 잘해서 예뻤고,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똑똑한 아들도 두었고, 남편도 전문직으로서 모든 것이 완벽했다. 더구나 그녀는 사람 다루는 재주도 타고나서 바람도 아주 능수능란하게 잘 펴 댔다. 나는 참 그녀를 좋아했고 그런 그녀는 나를 매우 하대했다.      

   ‘네가 어떤 남자를 만나서 어떤 사랑을 그려나가기를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네, 언니.’

   ‘천한 것 같아도 젊을 때 남자 사랑받는 게 최고란다.’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남편이 바람이 났다고 맞바람을 필 만한 대담한 여인이 몇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그런 몇 안 되는 여인들 중에 하나였다. 사실 그녀는 가을밤 밤나무 냄새를 기가 막히게도 잘 맡고 그것을 어떻게든 힘들지 않게 따 먹을 수 있는 능력녀였다. 그녀가 맞바람을 피운 것도, 총각을 꼬셔서 기가 막히게 먹어 버린 것도,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훌륭한 여자라는 사실이 나는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독서량도 뛰어나서 꽤 지적으로 농담도 잘했다.      

   ‘그냥 저는 언니가 제 남자였으면 좋겠어요.’ 끝까지 나는 맛있는 부대찌개에 비벼 먹은 눈치를 그때까지도 재건하지 못했다. 

   ‘남자 놈들이 뭐가 좋냐.’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고 사라졌다.      


   그런 그녀가 볼 때 사랑이라는 이름의 낭만을 추구한다고 연극 대사를 주절거리며 한밤의 불나방이라도 기껏 될 남자들의 고요한 외침을 잘도 무시하는 無智순수한 한 여인을 보면서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했을까. 대 자연이 선사한 탐스러운 과일을 우리는 열심히 따 먹어야 할 의무가 존재하는 것인데 낭만의 역설에 빠져서 코앞에 있는 과일도 못 따 먹는…. 

  낭만이라는 것도 앞뒤를 연결해 보면 상대적인 것이었다. 그 상대성은 바로 오늘 이 글의 제목처럼 당신에게만 강요되는 사랑은 있고, 나 자신이 감수해야 할 사랑은 없다. 따라서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든 힘이 될 때까지 주워 먹고, 먹고 계고 또 먹고 먹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의 정사가 돌이켜보니 낭만이었네, 아 어떤 날은  내통이었지, 또 어떤 때는 그것은 뭐였지? 등등 삶은 더욱 찬란하게 빛날 것이고 결국 그중에 하나 정도는 사랑으로 변모될 것이다. 그렇게도 여자들이 남자들한테 받고 싶었던 낭만, 낭만. 참 지옥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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