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랜 거미에게

by 분촌

여름이 부서지는 소리는 주황 랜턴이 켜지는 소리와 비슷했던 거 같아

-철도 없지.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고?


아무리 살펴봐도 머리를 찾을 수 없었어 팔다리는 사방으로 튀어 있었고 흐르는 피 위에서 랜턴 불빛이 장난을 치고 있었어 온도가 없는 목소리에 신이 나서


-머리가 없어진 친구들을 알아. 고통이 읽히지 않아서 좋지.

어느 여름 오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위에 무참히 찧어댄 머리통이 부서졌더라는 이야기라든지 고층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머리만 빼놓고 살게 됐다는 이야기라든지 돌아보면 지독하게 질긴 이야기였어 네가 울 때 중심에 웅크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귀를 세우고 내가 들은 모든


이야기는 쉬지 않고 넓어지는 너의 거미줄

너의 진화는 놀랍고 지나치게 빠르지

목소리를 꽁무니에 우겨 넣고 그 다음은 머리를,

부서진 것에 대한 너의 무지를 용서한 이유이기도 했는데


-여름 그늘의 목에 난 이빨 자국은 창백한 햇살이 남긴 거야. 태양에겐 좋은 먹잇감이 아니겠니?

너는 이제 유령만큼도 성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게워내며 나의 동정을 바라고

웅크렸던 중심을 떠나 말라버린 살점들을 파헤치고 다녀


마침내 진화가 끝났구나


-피를 핥고 있었어. 햇살에 피가 돈 건 그때부터야. 햇살과 겨울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으니 어쩌겠어?

길게 늘어진 묵음에는 주황 랜턴과 터져버린 심장의 무늬가 남아 있구나 너의 늘어가는 인드라망을 밝혀 줄,

-겨울은 가깝고 그 아이는 너무 멀어. 하지만 우리의 중심은 여전히 그 심장이야. 안 그래?

돌아보면 지독하게 질겼던 겨울 이야기 지독하게 질겼던 너의 연약함 지독히도 너의 시선을 가려주었던 질긴 눈물


목격자들은 언제나 무언가를 나누곤 하지 너와 나누는 것이 슬픔인지 싱그러운 여름의 뜯겨진 살점인지 알 수 없을 때부터, 그 아이의 팔다리나 으깨진 머리가 아니길 빌면서


나는 너의 진화한 목소리가 무서워졌어 그 아이의 눈물이 흘러들어간 곳, 내 심장을 향해 너는 화려하게 디자인 된 묵음들에서 질긴 실을 뽑아내고 있었구나


머리를 찾아온다면 얘기를 계속 들어줄게

나는 그 다음 이야기를 알지만


(태양은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졌다가 그날 밤 다시 되돌아온 거야, 달 분장을 하고서. 낄낄거리며 장난을 기다리던 랜턴들의 이빨을 깨워 피를 빨아 먹었다고.)


그 많은 살점을 뜯어내고도 찾아지지 않는 하나의 심장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고통 속에 있으면서 고통을 흉내 내며 네가 울 때 너의 지독히도 질긴 눈물이 징그러운 나는


눈부셨던 여름 그늘의 호흡을 생각해 그 호흡이 어떻게 잠들어갔는지를

너는 실을 잇고 또 이어서 내 심장의 박동을 따라왔지만 실이 붙지 않아 약이 오른 너 머리를 찾아오지 않으면 그곳에서 죽게 될 거야 지긋지긋한 실 끝에서 대롱거리며 뽑아내지 못한 실을 뱃속에 잔뜩 품은 채

거미들이 또 집을 짓네 조심하라고, 오늘 밤 또다시 그 달이 뜬다고, 나는 호루라기를 불며 모퉁이에서 모퉁이로 뛰어다니고 싶어 달라붙고 싶어 네가 질릴 때까지 무지하고 싶어 얄밉게 너의 거미가 되고 싶어


(못다 피우고 떠난 청춘들을 생각하며, 2023년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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