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분촌

사로국의 소도, 부리마을에 밤이 깊었다. 집집마다 등불이 모두 꺼졌으나 세상은 밝은 달 덕분에 대낮처럼 환했다. 국읍으로 통하는 마을 입구에는 솟대가 세워져 있고, 솟대 위에는 방울과 북이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오자, 맑은 방울 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퍼져나갔다. 솟대 너머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작은 깃발들이 가지들을 깃대삼아 나뭇잎과 함께 바람에 나부꼈다. 달빛 속에서 수줍은 춤사위처럼 흔들리는 깃발엔 반달곰이 그려져 있었고, 마을 안 울타리 곳곳에도 같은 깃발이 꽂혀 있었다.

부리마을은 사로국 국읍의 북쪽에 있었고, 마을 북쪽 끝에는 부리산이 솟아 있었다. 부리산은 사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진한을 통과하여 먼 북쪽 나라까지 이어지는 첩첩산맥의 뿌리였다. 산봉우리는 둥그스름한 모양을 하고 있었고, 봉우리 아래로는 달못이라 불리는 커다란 호수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맑은 날 밤이면 아름다운 황금빛 달이 삼한 땅을 어루만져주었다. 동쪽 하늘에 햇살이 스며들 무렵, 달의 정령 월백 하얀 달집을 하늘 가장자리에 남겨둔 채 삼한 땅으로 내려왔다. 월백은 낮 동안 뜨거운 태양을 피해 깨끗하고 맑은 물속에서 쉬어야 했기 때문에 삼한의 호수를 찾아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 중 부리산의 달못은 월백에게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달못은 단지 쉼터가 아니었다. 그 물에는 월백의 오래된 눈물이 스며있었다. 슬픔과 그리움의 기억을 함께 지닌 달못은 월백의 아픔이자 고향이었다. 월백은 그곳을 사랑했고 그의 마음은 언제나 그곳과 연결되어 있었다.

월백이 달못을 찾아오는 밤이면, 어김없이 어린 반달곰 한 마리가 그곳에 있었다. 반달곰은 달못가에 피어있는 빛나는 흰 꽃들을 뜯어 먹기도 하고 호숫물을 핥기도 하며 놀다가, 동틀 녘 월백이 내려오면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월백은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소리도 없이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곤 했다. 월백이 물속으로 잠기는 동안 황금빛은 물보라를 퍼뜨리며 호숫물에 녹아들었다. 황금빛 물보라가 끝나고 은은한 반짝임만 남으면, 반달곰은 몸을 돌려 어슬렁어슬렁 숲속으로 사라졌다.

반달곰마저 떠나고 나면, 달못은 한없이 고요했다. 물에 녹아든 월백은 물의 모습으로 잠을 잤다. 잠든 동안에는 늘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외롭고 연약한 눈 먼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가 되어 준 옛 달의 정령 선아와, 눈물을 흘리며 빛나는 흰 꽃에 대한 꿈이었다. 이들 셋은 새 달의 정령 월백을 태어나게 해주었고, 또한 월백 안에 영원히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월백이 이들의 꿈을 꾸는 것은 이들이 바로 월백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반달곰이 부리산에 오기도 전인 아주 먼 옛날, 달이 호수 속에서 쉬는 방법은 지금과 달라, 달빛이 물에 녹아들지 않고 물과 섞여 몸으로 화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빛의 입자가 달못의 물 입자와 뒤섞여 살을 만들고 모양을 이루어낸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몸 때문에 달은 크나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것도 자신이 믿고 사랑했던 조선의 후예들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