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미설과 달

by 분촌

미설은 먼 북쪽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는 진한의 역사보다 더 나이가 많았는데, 사로가 작은 촌락이었다가 점점 크고 부강해지는 것을 보았고, 유리 이사금이 진한 연맹체를 이루는 것도 보았다. 달과의 우정도 그만큼 오래되었다.

미설은 천신의 아들 왕검이 세운 북쪽 나라 조선의 마흔여섯 번째 임금이었다. 그러니까 미설은 천신의 자손이면서 삼한 백성의 조상이기도 했다. 아주 오래 전 조상인 미설이 그 후예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 이유는 아주 특별한 사건 때문이었다.

미설은 백성을 무척 아끼던 어진 임금이었다. 임금 미설은 백성들의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백성들을 고생 시키지 않으려고 궁궐을 작게 지어 검소하게 살았으며, 백성들이 힘겨워하지 않도록 세금도 일 년 수확의 2할만 내게 했다.

백성들은 임금을 사랑하고 하늘처럼 따랐으며, 이웃 간에는 아름다운 풍습을 만들어갔다. 땅은 넓고 비옥했으며, 기술도 훌륭하여 나라는 무척 부강하였다. 살기 좋은 나라라는 소문이 나서 먼 이웃 나라 사람들도 끊임없이 이주를 해오는 곳이었다.

오랫동안 조선을 잘 다스린 미설은 눈썹이 하얗게 셀 만큼 늙자,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곤 평생 꿈꾸었던 시간을 갖기 위해 홀로 길을 떠났다.

사흘 동안 걷고 또 걸은 미설은 아홉 개의 봉우리를 가진 높은 산에 다다랐다. 그 산은 구봉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미설은 사람의 발길이 한 번도 닿은 적이 없는 첩첩산중으로 들어갔다. 네 개의 산봉우리를 지나 가장 높은 다섯 번째 산봉우리에 도착한 미설은, 구름이 흐르는 봉우리 밑에 손수 오두막을 짓고, 풀뿌리와 산열매를 먹으며 지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홀로 자신을 갈고 닦으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이것을 몰래 지켜 본 신선들이 미설을 갸륵하게 여겨 신비한 과일 나무 하나를 주기로 하였다. 신선들의 과일 나무는 매우 까다로워 아무 땅에나 자랄 수 없었다. 과일 나무를 심을 장소를 고민하던 신선들은 만장일치로 부리산의 달못 근처 숲속을 정하였다. 달못 근처의 흙은 신비한 힘을 가진 달못 물이 멀리까지 스며있었다. 따라서 여느 흙과 달리 신선들의 과일 나무가 죽지 않고 잘 살도록 보호해 줄 수 있었다.

신선들은 달못 근처 숲속,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과일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는 신선들이 키우던 꾀꼬리들 중 한 마리를 미설의 오두막으로 보냈다. 꾀꼬리는 먼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부터 울타리에 앉아 요란하게 짖어댔다. 미설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와 보았다.

울타리 위의 꾀꼬리는 산 속에서 가끔 만나는 꾀꼬리와는 다른 데가 있었다. 몸집도 조금 더 컸고, 노란색 깃털은 황금 가루를 뿌린 듯 반짝였다. 그리고 머리 전체가 예쁜 무지갯빛 털로 덮여있었다.

놀라운 것은 생김새뿐만이 아니었다. 꾀꼬리가 부르는 노래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무언가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미설은 넋을 잃고 어여쁜 꾀꼬리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꾀꼬리가 포르르 날아, 저만치 소나무 가지 위로 옮겨가 앉았다. 미설은 홀린 듯 꾀꼬리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미설은 길고 긴 여행 끝에 신선들의 과일 나무가 있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꾀꼬리는 과일 나무 위에 앉더니 더 이상 날지 않았다. 미설이 보니 과일나무의 생김새가 참으로 기이하였다. 나뭇잎은 보랏빛이 돌고 윤이 났으며, 과일은 하얀색인데 둥글고 먹음직스러웠다.

미설은 오랜 여행으로 지쳐 있었고, 너무나 배가 고팠다. 산줄기를 따라 거친 산길로만 왔기 때문에 손발은 몹시 부르텄고, 넘어져 다친 상처는 아렸다. 미설은 우선 허기부터 달래기로 하고 허겁지겁 과일 하나를 따 먹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주먹만 한 과일 하나를 먹었을 뿐인데 배가 불렀다. 그리고 기운이 솟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뭇가지에 긁히고 돌에 채여 생긴 상처에서 피가 멈추고 살이 아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미설은 그 과일나무가 신선들이 먹는다는 신선과 나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미설은 신선과 나무 곁에 새로 오두막을 지어 살기로 하였다. 꾀꼬리도 함께 머물렀다. 미설은 꾀꼬리에게 무지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신선과를 먹으며 오랜 세월 마음을 닦고 또 닦은 미설은 마침내 신통력을 얻게 되었다. 신통력이 생기자, 가장 먼저 무지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조선의 후예들도 북방에서 남쪽으로 내려오고, 달도 그들을 따라 삼한 땅 곳곳에 쉴 곳을 정했다.

미설은 부리산을 찾기 시작한 달과 친구가 되었고, 신통력 덕분에 달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달과 미설은 그로부터 수 백 년 동안 우정을 나누며 살아왔다. 달과 미설에게도, 삼한의 백성들에게도 더없이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평화로운 세월이었다.

그러나 달이 달못에 갇힌 이후, 미설의 마음은 슬픔과 후회로 가득 찼다. 미설은 달이 파묻히는 것을 막지 못한 자신을 탓하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미설은 예전에 살던 구봉산에 자주 다녀오곤 했다. 구봉산에는 여느 산보다 귀한 약초가 많았다. 미설은 구봉산 오두막에 머물며 약초를 모은 후, 북쪽 나라들과 남쪽 삼한 곳곳의 저잣거리에 나가 필요한 물건과 바꾸었다. 그렇게 하면 수백 년을 살아도 같은 백성들을 마주치는 일이 없어 좋았고, 조선의 자손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미설은 이렇듯 부리산을 떠나 있을 때가 많았다.

달이 묻히던 날도 미설은 구봉산의 아홉 개 봉우리를 다니며 약초를 캐고 있었다. 달이 애타게 미설을 불렀지만, 너무나 멀리 가 있던 탓에 미설은 달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달못에 간 미설은 너무나 놀라고 상심하여 며칠 동안이나 앓아야 했다.

미설은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겼다. 오랜 친구인 달을 지키지 못한 것도 죄요, 달이 사라져 고통 받는 진한 백성들에게도 크나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미설의 마음은 늘 바윗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리고 다시는 부리산을 오래 떠나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