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이었다. M과 카톡을 하면서 둘다 일정이 있으니 영화를 보기로 약속했던 토요일에 만나야겠다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근데 우리 뭐 보기로 했었지?’라는 질문을 받았다. 운동을 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그 말에 너무나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스스로도 이런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정색을 하는 것이 맞는 건가 싶어 일단 땀을 흘리며 기분을 가라앉히자고 생각했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정리한 생각을 말했다. 문제는 영화 제목이 아니라고, 원인은 나를 대하는 태도와 나와 함께 있을 때의 모습에 ‘진지함’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완곡하면서도 명료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건 내가 하는 말이 그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그날 반푼이 같은 ‘서로 더 노력하자’라는 말을 하며 통화를 마쳤지만, 그 뒤로도 사라지지 않는 어색함과 찝찝함은 어찌할 수 없었다. 연락은 뜸해졌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장소를 대하듯 우리는 서로를 힐끔거리며 의식하면서도, 일부러 대화를 피했다. 가끔 메시지를 주고 받았지만 평소보다 격식을 차려야 할 필요를 느끼며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신경 썼고, 이모티콘이나 자음 사용에 주의했다. 업무용 메신저처럼 반듯하게 건조한 말들을 쓰라린 심정으로, 한편으론 불쾌한 기분을 애써 감추며, 주고 받았다.
그와의 이별을 어렵지 않게 직감한 건 그것을 내가 원했기 때문일까. 이별을 가장 처음으로 예감한 시점을 언제라고 해야 할까. 급속도로 분위기가 굳어버린 채팅창을 마주하기 한참 전, 그러니까 그날 ‘아참 이 영화 보기로 했었지’라는 그의 뒤늦은 카톡을 보기도 전, 어쩌면 그가 ‘이전에도 너는 똑같은 지적을 한번 했었다’고 기억하는 그 와인바에서 그를 의도치 않게 몰아세웠을 그날보다도 훨씬 전에, 나의 좁은 이기심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어떤 모습을 그에게서 처음 발견했던 그 순간에, 모든 게 시작된 걸까.
영화관에 들어선 뒤부터 나는 산 송장과 나란히 앉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우리는 빨대를 하나 꽂은 아이스 커피를 좌석 사이에 놓아두고 번갈아 목을 축이며 영화를 감상하기 시작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어색한 두 손을 다소곳이 모아 외투 위에 올려놓은 채 스크린을 바라봤다. 원래 같았으면 나의 오른팔이나 손, 아니면 허벅지에 놓여 있었을 그의 투박한 손이 초조하게 반대쪽 엄지 손톱을 뜯고 있는 모습을 보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중반을 조금 넘어섰을 때, 나는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천천히 그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었다. 내 손 잡아, 마지막 기회야, 지금 잡아줘...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는 몇몇 장면에서 두세 차례 작게 헛웃음을 내고 몸을 뒤척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을 계속해서 놓지 않고 있던 내 손은 단 한 번도 부드럽게 쥐어주지 않았다. 엔딩크레딧이 끝나기도 전에 상영관의 조명은 성마르게 켜졌다. 나는 3천 피스 정도 되는 직소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 들고 있는 사람의 심정으로 슬며시 그에게서 손을 뺐다. 틀리지 않았구나. 영화관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이 몹시도 무거웠다. 하늘이 어둑해져가는 저녁이었음에도 바깥 공기는 거짓말처럼 포근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3월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제 남은 행선지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결코 짧게도 느껴지지 않았던 관계에 마침표를 찍는 일임을 나도 그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느냐의 문제일 뿐이었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겠어?”
“안 될 것 같아.”
“그럼...”
“미안해.”
그의 말은 나의 말이었고, 나의 질문이 그의 답이었다. 우리는 말을 아꼈다. 더 이상 이별에 대해 더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 꺼낼 만한 말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견디기 어려운 침묵 속에서 말을 아낀 것처럼, 그와 나는 되돌릴 수도, 되돌릴 희망도 없는 결론을 함께 내림으로써 시간을 아끼기로 했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나는 그가 자신의 술값을 치르는 시간만큼 조금 더 자리를 지켰지만, 그건 누가 보더라도 막 헤어진 연인의 자존심을 의식적으로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잉된 표현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이별했다.
결국 영화 결말처럼 됐네, 라고 헤어지기 전, 그는 말했다. 나는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그가 먼저 지하철역으로 사라지고, 나는 어쩐지 그 자리에 못박힌 동상처럼 잠시동안 움직이지도 못한 채 멈춰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황망해졌던 순간이 지나자, 그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우리의 결말은 영화와 다르다고, 영화 속 그들은 가장 순수하고 빛나는 순간 헤어져야 했기 때문에 투명하고 단단한 슬픔을 안고 성장했겠지만, 우리는 그저 서로의 미숙하고 못난 모습을 인정하고 감싸 안아주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마주함으로써 끝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를 대할 때 한 번도 부끄러워 해볼 줄 몰랐던, 뭔가 더 정확하고 납득 가능한 진실을 '가르치는' 듯한 태도로, 그런 말을 끝끝내 마음 속에서 뱉어내는 나 자신을 보며 생각했다. 결국 그 한계란 나의 교만과 비겁함었다고, 나는 이 사실을 후회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이별은 이미 끝나 있었다.
- 2018년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