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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러기 May 21. 2019

가난과 자존심의 역사

저녁을 먹으러 집 앞 시장에 있는 국밥집에 갔다. ‘착한가격’ 간판을 달고 순댓국이며 뼈해장국 같은 메뉴를 저렴한 값에 파는 식당이었다. 외식에 쓸 수 있는 돈이 늘 충분하지 않은 내게 이런 밥집은 고마운 존재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었지만 먹을 만하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들어가 순댓국 하나를 시켰다.


테이블 위에 공기밥과 김치가 단출하게 차려졌고 5분쯤 지나자 음식이 나왔다. 특이하게 뚝배기 대신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순댓국이 담겨 있었다. 숟가락을 휘휘 저어보니 저렴한 가격치고 고기도 꽤 많이 들었어서 흡족했다. 뼈 육수 대신 부추와 양념장으로 간을 해서인지 국물은 조금 짰다. 하지만 밥 한 그릇과 같이 먹기엔 나쁘지 않았고, TV에서 방영 중인 일일 연속극을 흘끗거리며 혼자 우적우적 식사를 시작했다.


절반쯤 먹고 있을 때였다. 건더기가 얼마나 남았나 보려고 숟가락으로 그릇 바닥을 긁어 올렸는데 희뿌연 국물 속에서 뭔가 작고 검은 물체가 보였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숟가락 끝에 눈을 가까이 가져갔다. 새끼손톱보다 조금 짧은 그것엔 또렷한 더듬이가 두 개 달려 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제가 원래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종업원은 미간을 찌푸리고 내 손에 들려 있는 숟가락을 물끄러미 보더니 물었다.


“이 안에서 나온 건가요?”


그럼 제가 방금 주워서 빠뜨렸을까요? 나는 되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네, 먹고 있는데 나왔네요. 종업원은 자연스럽게 내가 먹던 그릇을 집어가며 짧게 말했다.


“새로 해 드릴게요.”


그의 말에는 음식에서 뜻밖의 것이 등장한 상황에 당황스러워 하거나 그걸 먹던 내가 느꼈을 불쾌함에 미안해하는 듯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마치 몇 번인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다만 특별히 재수가 없는 케이스를 마주한 것처럼 태연하고 어딘가 씁쓸해하는 말투였다. 그가 물었다. 밥도 새로 드릴까요?


나는 국에서 나온 벌레보다 종업원의 기묘한 태도에 이미 입맛이 싹 사라진 상태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치고 싶었다. 아뇨, 됐습니다. 안 먹을래요. 하지만 그 때, 아직 반이나 남은 공기밥이 왜 눈에 들어왔는지, 미처 다 채우지 못한 허기가 마음에 걸렸는지, 잘 모르겠다. 돈을 안 받을 생각은커녕 한 마디 사과도 않는 종업원과 실랑이를 벌이면서까지 밥값을 안 내고 식당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뱃속에 들어간 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새로 한 그릇을 더 주겠다고 하니 이득인 건가 싶었다. 그대로 앉아 있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기분은 여전히 참을 수 없이 언짢았다. 나는 이를 꽉 물고 말했다. 밥은... 괜찮아요.


식탁 위에 금세 새로 올라온 순댓국을 뒤적이며 지금 내가 치욕을 견디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비위생적인 식사 때문이 아니었다. 후안무치한 식당의 영업 자세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돈 몇 푼 아끼려고 이곳에 제발로 걸어 들어와 이런 불쾌감과 수모를 겪고 있는 나에게 치욕을 느꼈다. 바득바득 고집을 부려 밥값을 치르지 않았더라도 이 후회스러운 기분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건 돈 없는 사람들에게 부담 없는 한 끼를 대접하려는 식당 안에서 얼굴을 붉히며 또박또박 나의 불만족을 납득시킨다고 회복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의 의미를 처음으로 온전히 이해한 건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우리 집은 구청에서 주선해 준 복지 서비스의 일환으로 어느 대기업 건설사와의 자매결연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회사의 임직원들이 지역의 한부모 가정과 1대1로 매칭되어 생필품이나 여가 생활 등을 후원해주는 방식이었다. 그 프로그램의 특징은 현물 지급이라는 점이었는데, 그 말은 곧 통장에 찍힌 금액이 아니라, 대형마트의 계산대 앞에서 생판 모르는 남이 지갑을 여는 모습을 통해 후원이 이뤄진다는 뜻이었다.


동생을 데리고 서울역으로 그 후원자를 만나러 가던 일요일을 기억한다. 날씨가 좋았고 나는 무척이나 긴장을 하고 있었다. 긴장의 이유는 많았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고, 그 자리에 엄마 없이 우리 남매 둘만 나가야 하는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엄마는 주말에도 일을 하느라 늘 바빴다. 나는 우리의 옷차림이 너무 궁해보이거나 혹은 반대로 너무 안 불쌍해보이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내내 놓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년의 회사원에게 인사를 했을 때, 그는 나와 동생의 이름을 불러주며 알게 되어 반갑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처음으로 가본 베니건스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몇몇 친구들에게서 듣기만 하던 곳에 드디어 왔다는 기쁨을 드러내야 하는 건지, 패밀리 레스토랑 정도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는 것처럼 익숙한 자세로 메인 디쉬를 기다려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그 아저씨도 내심 자리가 어색했는지 말이 적었다. 나는 가끔 건너오는 뻔한 질문에 대답을 하며 잠자코 빵을 뜯고 꾸역꾸역 고기를 썰어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그 옆에 있는 롯데마트에 들어갔다. 아저씨는 나랑 동생을 앞세우고 뒤에서 천천히 카트를 끌며 따라왔다.


“천천히 둘러보면서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 하렴.”


그 말은 여지껏 살면서 들어본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나와 우리 가족의 필요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한단 말인가. 필요라는 건 어느 선에서 필요로 인정되고, 어떤 기준을 넘어섰을 때 사치가 되는가. 나는 라면 대신 후라이드 치킨과 돈까스와 소고기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냉동만두 한 봉지를 집어들어 소심하게 카트에 넣었다.


그 날 있었던 모든 일이 비교적 생생히 머릿속에 있는데, 이상하게도 후원인 아저씨의 얼굴만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하루종일 내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그 후원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내가 이곳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공짜 밥을 얻어먹고 냉동식품이며 과일이며 샴푸 같은 것에 대한 나의 필요를 증명하고 있는 이유를 너무도 분명하게 알게 될 것 같아서. 어린 아이였던 나는 그 사실이 몹시도 싫었던 것이다.


한때는 가난이 단지 내가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의 수준만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가난이 진짜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자존심임을 깨달았다. 생활이 팍팍해지면 질수록 나의 욕구와 그것을 충족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상상력은 좁아졌다. 그렇게 서서히 찌부러드는 삶을 어느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너무 낯설고 너무 정확하게 목격해버리는 때가 있었다. 십여년 전의 서울역에서 조건 없는 베풂을 당한 날이 그랬고, 며칠 전의 식당에서 벌레가 나온 저녁밥을 리필해서 먹은 날이 그랬다. 형편이라는 건 에어백과 같아서 두텁지 못하면 더 크게 다치기 마련이었다. 내 경우엔 자존심이 가장 먼저, 자주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지금은 한 가지 나아진 점이 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쪼들리는 생활이나 선택의 폭이 충분히 크지 못한 것이 모두 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을 자책하고 반성하고 더 근면하게 노력해서 가난을 벗어나야 한다는 논리에 적당히 코웃음을 칠 수 있게 되었다. 그 또한 결국 나와 누군가의 자존심을 학대하여 얻어지는 성취임을 알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그렇게 못난 사람이 아니고, 단지 운이 나쁘거나 아직 좋은 기회를 만나지 못해 조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대책은 없지만 또 다른 상처도 없는 위로다. 나는 그 사실이 꽤 마음에 든다.


- 2018년 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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