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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스러기 Mar 19. 2021

실패한 사랑의 실험

지난 주에는 드라마 한 편을 정주행했다. 자기 전에 조금만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결국 동이 트는 걸 보게 만들었던 건, 2012년에 tvN에서 방영한 <로맨스가 필요해 2>였다. 서른 셋 여자 주인공(정유미)이 오랜 시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해 온 남자(이진욱)와 자신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주는 새로운 남자(김지석) 사이에서 갈등하는 스토리다. (이 드라마가 나오고 2년 뒤에 방영된 KBS 드라마 <연애의 발견>에서도 매우 비슷한 설정이 나오는데, 여자 주인공을 똑같이 정유미가 연기한다. 알고 보니 같은 작가가 집필한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결말도 비슷하다)


갑자기 9년 전 드라마를 찾게 된 이유는 처음 이 작품을 소개해 준 사람의 말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너는 두 사람을 동시에 좋아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 때 나는 그 친구의 물음에 어떻게 답했었던가. 아마도 고개를 가로젓거나 그냥 모르겠다, 고 말했을 것이다. 내게는 그런 일이, 사람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상상 속에서도 그려진 적 없었으니까. 나는 사랑의 방향이 레이저처럼 언제나 한 곳을 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직진하는 빛은 서로 다른 곳에 동시에 닿을 수 없으므로,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어쩌다 한눈을 팔게 되는 건 잠시(어쩌면 영원히) 그 시선을 거두고 다른 곳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내게 <로필2>를 알려주었던 친구는 보란듯이 자기의 고민을 실행으로 옮겼다. 두 개의 만남을 시작했고 각각의 관계에서 만족을 얻었다. 그 애는 그것을 마음의 알파벳이라고 불렀다. 내가 필요로 하는 A, B, C를 모두 찾기 위해, A와 C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한편 B를 느끼게 해주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편하게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때때로, 자주 달라지지 않나. 나의 입체적인 공허함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채워줄 수 있는 사람들과 동시다발적인 만남을 갖는 건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매우 합당한 태도였다.


내가 알파벳의 두 번째 연인이 된 건 그런 설명에 너무도 쉽게 납득되어버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 애를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애의 마음의 일부가 되어 그토록 바라던 순간들을 누릴 수 있었다. 그 때의 난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애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만나더라도 괜찮다고, 아무 상관 없을 거라고 믿었다. <로필2>에 바로 그런 대사가 나온다. 오랜 연인이었던 주열매(정유미)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에 대해 윤석현(이진욱)은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합리화'한다.


나현: 언니가 그 사람을 좋아하잖아요.
석현: 근데?
나현: 선배가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니까요. 근데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게 말이 돼요?
석현: 너 존재허용적 사랑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냐?
나현: 뭔데요 그게?
석현: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의 존재를 허용하는 것. 너 같이 무식한 사람을 위해 설명을 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나의 기대, 자기 욕심, 나의 소유욕을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지?
나현: 뭐 별거 아니네요. 앤소니 기든스가 말한 합류적 사랑하고 같은 개념이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관계 내에서 지배를 당하기보다는 어떤 상호성을 이루는 방식? 또 내 욕심보다 상대방의 안녕과 성장을 위해 관심을 쏟는 사랑. 맞죠?


윤석현이라는 인물의 말을 '합리화'라고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끝내 '존재허용적 사랑'을 이루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드라마를 거칠게 요약하면 '진정한 의미의 존재허용적 사랑을 하는 이들이 혼자 남겨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30대의 복잡한 연애와 솔직한 사랑을 그리는 듯했던 드라마는 결국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결말을 보여주며 끝난다. 그것이 어딘가 아쉬우면서도 그럴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가 자기 자리와 짝을 찾아나가는 '일반적인' 30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따위 고민하지 말고 아무나 마음 가는대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건 TV드라마로서 위험한 선택이니까. 사람들은 나의 삶과 닮아 있는 스토리에서 안전한 공감과 해답을 찾고 싶어서 드라마를 본다. 기존의 가치관을 깨고 모험을 즐기려는 게 아니라.


공교롭게도 나는 모험을 하기로 마음 먹은 쪽이었다. 드라마가 말해주는 결말이 아니라 현실에서 직접 답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모험이 그렇듯이, 나와 알파벳의 관계는 원대했던 시작에 비해 허무하게 끝이 났다.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존재허용적 사랑에 실패한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내가 갖지 못하는 그 애의 마음을 가진 다른 연인을 질투했고, 자신이 원하는 관계를 양쪽에서 모두 누리며 살아가는 그 애를 질투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대, 욕심, 소유욕을 포기하는 일이 나의 감정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의 나에게는 꽤나 큰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준 경험이었다. 알파벳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데 나의 마음을 이용했음을 깨달아서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그 애가 나를 이용하거나 가벼이 여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애의 감정은 오히려 솔직하고 순수한 진심에 가까웠다. 나를 놀라게 하고 실망시켰던 건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이었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태도여야 한다고 줄곧 믿어 왔던 것. 그러나 막상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게 되자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없었던 것.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내가 손쓸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그리고 이 모든 이유는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는 것. 나에게는 사랑의 감정이 이런 식으로 작동하고, 사실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나의 경우에는, 이 사람의 경우에는 뭔가 다를 거라 생각했던 무지. 그것이 나를 많이 괴롭게 했다.


드라마를 보고 요며칠 동안 이런 지나간 일들을 자주 떠올렸다. 지금 내가 그 때와 같은 실수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나는 그 이후로 내가 이만큼은 성숙해졌다고, 나 자신을 어느 정도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왔는데. 돌이켜보니 채 한뼘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순진하고 무모했던 그 때 그 자리에 여전히 머물러 있구나. 변한 게 있다면 이제는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모른 척 해서' 슬퍼지는 날들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들로 뒤척이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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