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잉글랜드 이즈 마인>이라는 영화를 주말 저녁에 보게 되었다. 영국의 전설적인 뮤지션 모리세이(Morrissey)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다룬 전기영화다. 1970년대 말부터 1982년 모리세이가 밴드 ‘더 스미스’를 결성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몇 년 전 모리세이의 ‘Everyday is Like Sunday’라는 곡을 듣고 반해서 그의 앨범을 찾아들었다가 별로 취향에 맞지 않아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웠었다. 더 스미스의 음악은 아예 접해본 적이 없었다. 브릿팝을 한때 좋아했지만 그 역사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뮤지션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아마 모리세이 역으로 나온 배우(잭 로던)가 아니었다면 안 봤을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오랜만에 본 ‘천재 아티스트의 무명 스토리’ 영화는 익숙한 동시에 또 흥미로운 면이 있었다. 영화 자체에 대한 스포일러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일단 흥미로웠던 지점은 영화의 엔딩이었다. 기존의 음악 영화의 장르적 서사가 ‘꿈 많은 풋내기—동료를 만남—온갖 시련—끝내 이뤄내는 뮤지션 꿈’이라는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잉글랜드 이즈 마인>은 이 기승전결의 밝은 미래가 시작하기 직전의 순간에 끝을 맺는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는 모리세이라는 뮤지션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첫번째 밴드 ‘더 스미스’가 등장하지 않는다. 같이 밴드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한, 훗날 더 스미스의 기타리스트가 되는 조니 마의 집 앞에 모리세이가 찾아오고 문 밖으로 드리워진 그의 실루엣이 보이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모리세이의 본격적인 밴드 활동과 전성기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겐 황당한 결말일 수 있지만, 영화가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퇴장하는 그 자신감이 나는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집중해서 그려내고자 한 모리세이의 모습은 유의미했는가? 글쎄, 그건 의문이다. 이 영화에서 스티븐 모리세이는 러닝타임 내내 세상과 불화한다. 그는 맨체스터의 노동자 문화에도,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과 생계를 위해 틀에 맞춰진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도 적응을 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 줄곧 불행하거나 우울했고, 그에게 영감을 주고 지지를 보내준 몇 안 되는 친구들은 여러 이유로 떠나 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런 기구한 스토리에서 우리는 왠지 모를 친숙함을 느낀다. 특히 그 주인공이 불세출의 천재 예술가였을 때, 이런 이야기는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그것이 실제 같은 허구인지 각색된 실화인지는 중요치 않다. 핵심은 그 사람이 얼마나 ‘정상’이라는 기준에서 먼 삶을 살았으며 그로 인해 어떻게 남들과 다른 성취를 이뤄냈고, 그 과정에서 어떤 곡절과 희열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예술가에게 투사하는 이미지이자 기대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라이프>의 데인 드한이 연기한 제임스 딘이 그러했고, <본 투 비 블루>에서 에단 호크가 변신한 쳇 베이커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아가는 사회부적응자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불안과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청춘을 보낸 이야기가 최소한의 의미를 가지려면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끝내주는 성공을 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적어도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집에 돌아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악하거나 비겁하거나 하다못해 찌질한 영웅은 우리가 믿는 세계에 작지 않은 균열을 낸다. 우리는 그들의 비정상성과 탈규범적인 행보를 더 이상 비범한 업적과 연관시키지 않고 그저 다른 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으로 바라보게 된다. 극장을 들어서기 전과 극장에서 나온 후의 느낌이 사뭇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그건 우리가 영화를 보며 새로운 체험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잉글랜드 이즈 마인>은 전자의 길을 버리고 과감하게 후자를 택했지만, 아쉽게도 천재 예술가 전기 영화의 진부한 친숙함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그건 영화가 보여주는 데 성공한 진실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우리는 모리세이라는 인물의 실체에 가까워졌다는 확신을 얻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머릿속을 알 수 없는 괴짜 같은 아티스트로, 우상화되고 신비화된 대상으로 남는다. 예술과 창조성에 대한 우리의 익숙한 관념처럼.
다만 천재 예술가의 재능을 알아보고 계속 지지하는 주변 인물들의 격려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생계를 담보로 자신을 억압하는 현실과 창작을 향한 열망 사이에서 고군분투 하는 삶이 스크린 밖에서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처에 존재하는 모리세이들에게 필요한 건 그런 응원이 아닐까. 넌 할 수 있다고, 때로는 무모할 정도로 무한한 용기를 주는 말들. 그 말에 담긴 애정과 진심이 결국 누군가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