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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우 Jun 22. 2017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

만 18세 참정권 참여사회 기고글

지난 1월 7일, 월간 참여사회에 기고했던 글이다.

비록 만 18세 참정권을 외치던 겨울은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민주화의 봄'은 오지 않았기에




한국 청소년들의 현주소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 '고립'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학교라는 강제적이고 규율적인 공간을 비롯해 청소년들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으로부터 소외된다. 두발 규정, 교복 의무 착용 등 각종 규정과 폭력을 통한 억압은 청소년들의 목을 조이고 옆자리의 친구는 경쟁상대로만 느껴진다. 

이런 억압은 학원에서도 계속된다. 학원에서 학생들이 어떤 고충을 겪는지는 당사자들만 알 것이다. 바쁜 일과를 마친 집에서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온전히 청소년의 몫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위 '쳇바퀴 속 다람쥐'로 묘사되는 이런 일상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역할은,
그 피라미드를 부수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움직임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세 가지 있다. 우리의 목숨에 위협을 느낀 첫 사건, 바로 '세월호'다. 세월호 참사는 청소년 모두에게 그 크기에 상관없이 하나의 충격으로 존재한다. 기울어진 세월호와 함께 우리의 일상 또한 기울어져 있었다는 알아차렸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이 아닌 분노의 감정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분노가 표출됐고 일상성에 의심을 품게 된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기 위해 계속해서 광장으로 나왔다.

그 와중에 정부에서 통과시킨 국정화 교과서는 청소년들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국정화 교과서가 어떤 내용을 담게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스스로를 어른이라 지칭하는 비청소년들은 이를 막지 못했다.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정치는 항상 그들만의 리그였다. 청소년들에게는 늘 요구되는 역할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라는 것. 그렇지만 정말 웃기게도, 그 조언이 결코 청소년을 위한 조언이 아니었다는 것이 한 언론사가 입수한 태블릿 pc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배신감.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청소년들에게 남긴 상흔이다. 청소년들이 믿고 살던 가치와 적어도 그 가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언제나 그곳에는 내 자리가 있을 거라고 믿었던 모든 믿음으로부터의 배신이다. 더 이상 눈앞의 공부가 필요 없어진 청소년들은 일어났다. 아무리 공부를 해봤자 청소년들의 부모님은 최순실이 아니었다. 사유의 기회 없이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향해 달려가던 청소년들은 그제야 피라미드에서 한걸음 물러설 수 있었다. '이제 우리의 역할은, 그 피라미드를 부수는 일이다.'

            

▲  분노한 청소년들이 거리로 나왔다 ⓒ 참여사회


분노는 희망으로, 일탈은 변화로


청소년은 집회에서도 소수자로서만 존재한다. 어느 집회에서든, 청소년은 특별하게 취급받는다. 시민으로 동등하게 인정받지 못한 청소년은 또 소외당하고 말았다. 자유발언에 나와 무슨 말을 하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청소년이 공부를 해야 할 귀중한 시간을 반납하면서까지 나온 것을 기특하게 여기는 마음이 존재한다. 사회적으로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는 청소년도 사회의 동등한 시민이라는 것, 둘째는 청소년의 역할은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소수자인 청소년들에 대한 다수의 대상화, 이른바 '청소년 혐오'가
 사라져야 한다. 여성은 무조건 가부장제에 헌신해야 한다는 여성 혐오와 청소년은 무조건 수용적이고 수동적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청소년 혐오 논리는 다를 바가 없다.

청소년 혐오는 우리 사회 공동의 책임이다. 청소년들은, 어쩌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청소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청소년 운동은 '분노에서 비롯된 일탈'로서 비쳐 왔다. 하지만 분노만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 분노는 희망으로, 일탈은 변화로 바뀌어야 한다.

어른들은 청소년들을 조금 더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시국은 언제나 끝이 있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또한 끝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청소년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은 그 시작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

각각의 개체는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청소년을 배제한 사회운동은 성공할 수 없고, 어른들을 움직이지 못하는 청소년 운동 또한 성공할 수 없다. 쌍방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이 시점에 어떤 목표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풍부해지길 바란다. 바람이 매서워지고 있다. 하지만 촛불은 아직 꺼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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