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드레퓌스와 피카르가 나와서는 안 된다
1894년 12월의 어느 날 프랑스 파리 육군 사관학교 연병장에 한 남성이 군인들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걸어 들어온다. 잠시 후 군 고위 간부가 이 남성의 반역죄를 규정한 선고문을 낭독하고, 무장 병사 한 사람이 남성의 군복에 달린 계급장과 단추를 모두 떼어낸다. 남성은 본인의 무고함을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자신의 단검마저 두 동강 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 남성의 이름은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육군 포병 대위였다. 드레퓌스는 치욕을 감내한 것도 모자라 멀리 남아메리카의 프랑스령 기아나의 무인도, 일명 악마의 섬(Île du Diable)이라는 오지로 이송되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수감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9세기 중반 발표된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소설 몬테크리스토(Le Comte Monte Cristo)의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가 누명을 쓰고 마르세유 근처 바다의 이프 성채(Château d'If)의 감옥에 갇힌 것은 허구였지만 드레퓌스의 수감은 실제 상황이었다(물론 이프 성채는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이다).
19세기 말 육군 장교 드레퓌스를 둘러싸고 10여년에 걸쳐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은 프랑스의 사회 전체에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고 당시 상황에 대한 수많은 보고서와 이야기를 낳았으며 각종 창작물에서도 활용되었다. 최근 2019년에는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에 의해 ‘장교와 스파이(부제 : J’accuse ‘나는고발한다’는 뜻의 프랑스어로 후술할 에밀 졸라(Emile Zola)가 기고한 칼럼 제목이기도 하다)라는 타이틀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성실히 본인의 임무에 충실했던 모범 장교 드레퓌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먼저 드레퓌스가 체포된 배경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894년 9월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 정보부는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 우편함에서 한 장의 편지를 입수한다.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에 근무하는 막스 폰 슈바르츠코펜(Max von Schwartzkoppen) 육군 대령이었는데 이 편지에는 프랑스의 군사기밀이 수록되어 있었다. 정보부는 조사 끝에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체포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상적인 군의 수사 과정을 거친 검거로 보인다.
하지만 드레퓌스는 유대인이라는 당시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중세 이후로 유럽 사회가 불안하고 혼란에 빠질 때마다 유대인들은 차별받고 탄압당했다. 게다가 사건 발생 당시 역사적 맥락으로 인해 프랑스 내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20여년 전인 1871년 프랑스는 프로이센(지금의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했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이 탄생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대대로 독일이 흥하는 것에 알레르기를 일으켜 온 프랑스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프랑스는 패배의 대가로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물고 알자스-로렌의 영토도 빼앗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분노는 나폴레옹 제국에 대한 향수로 이어졌고 여론은 그 분풀이의 대상이 될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어긋난 분노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반드시 ‘마녀 사냥’이 있기 마련이며 그 희생양이 드레퓌스가 된 것이다.
억울함을 외치는 드레퓌스가 호송되는 장면을 지켜보던 많은 시민과 군인들 중 당시 참모본부 정보부장으로 갓 부임한 조르주 피카르(Georges Picquart)도 있었다. 피카르는 업무 인수 인계를 위해 여러 관련 자료를 열람하던 중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보기엔 근거가 다소 빈약할 뿐만 아니라 부유한 가정 출신인 드레퓌스에게 범행 동기가 있었을 리 없다는 생각에 홀로 뒷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당초 정보부장으로 내정되었다 번복된 위베르 조셉 앙리(Hubert Joseph Henry) 소령과 그 부하들이 슈바르츠코펜의 서신을 조작하고 있었음을 알아챈다.
과연 피카르의 의심엔 합리적 근거가 있었다. 이 사건의 수사 책임자는 강성 반유대주의자였으며 드레퓌스의 필체 일부가 스파이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상부에 이를 보고한다. 공교롭게도 보고를 받은 국방장관 메르시에(Auguste Mercier)는 당시 보수 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아 입지가 좁아진 상황에 처해있었고 이를 모면할 돌파구가 필요했다. 여기에 앙리가 조작한 허위 증거까지 합쳐져 결국 드레퓌스는 체포되었다. 사건의 향방은 처음에는 드레퓌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으나 상부의 압박을 받은 일부 동료들과 필적 감정가들이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면서 결국 드레퓌스는 유죄가 되고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만다.
피카르는 조사를 계속한 끝에 1896년 봄 문제의 필체가 군 정보국 소령 에스테라지(Ferdinand Walsin Esterhazy)의 그것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에스테라지가 수차례에 걸쳐 루앙에서 파리로 근무지 이전 요청을 했는데다가 우연히 베를린의 프랑스 대사관 근무자로부터 프랑스 군 내부의 첩자의 존재를 전해들은 것도 피카르의 확신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앙리는 시종일관 에스테라지가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와 졸지에 상관이 된 피카르에 대한 앙리의 감정은 좋지 않았고 피카르의 부임 이후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 피카르는 판결 당시의 필적 감정사를 찾아갔지만 그 역시 자신의 감정엔 오류가 없다고 강변할 뿐이었다. 군 수뇌부 역시 피카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이미 그들은 진범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는 데 급급했다. 군의 4개 부서에서 순환근무했다는 어이없는 이유를 대며 드레퓌스가 범인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추가 조사를 거듭한 피카르는 앙리가 휴가를 떠난 틈에 드레퓌스의 보안 문서를 찾아보고 더욱 더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게 된다. 때맞춰 르 마탱(Le Matin) 신문에 문제의 드레퓌스 명세서의 복사본이 실리고 군 수뇌부는 피카르에게 거의 협박에 가까운 질책을 가하고 좌천성 출장을 명령한다. 피카르는 프랑스 남부와 아프리카 북부 등을 떠돌고 그 와중에 감시까지 당한다. 힘에 부친 피카르는 변호인을 만난 자리에서 당시 로로르(L’Aurore) 신문 편집장이자 훗날 프랑스 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와 그 유명한 칼럼 ‘나는 고발한다(J’accuse)’를 쓴 작가 에밀 졸라를 소개받게 되고 이 만남은 사건의 흐름을 돌리는 도화선이 된다.
1898년 1월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가 에스타라지를 고소하여 군사재판까지 열리지만 결과는 무죄였다. 그리고 판결 이틀 후 드디어 로로르 신문에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가 기고된다. 이 칼럼에서 졸라는 진실을 은폐하고 드레퓌스에게 누명을 씌운 군 고위 관계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하고 비판하며 진실을 밝힐 것을 국민과 프랑스 정부에 촉구한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되려 졸라를 맹렬히 비난했고 칼럼이 실린 호외를 불태웠으며 유대인이 운영하는 상점을 습격하는 등 더욱 거세게 유대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군부는 졸라를 고소하고 피카르도 체포한다. 당연하게도(?) 법원은 에밀 졸라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고 졸라는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마저 박탈당한다.
하지만 이 과정을 지켜본 세계 각국은 프랑스 군과 정부의 부조리를 비난했고 프랑스 역시 대외의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부임한 국방장관 카베냐크가 사건의 전면적 재조사를 지시하고 이 과정에서 초반에 증거를 조작했던 앙리가 투옥되는데 얼마 후 그는 진실을 자백한 후 교도소 내에서 자살한다. 이후 정부는 피카르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고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 위원회가 구성한다. 영국 언론에는 진범 에스테라지가 자백했다는 기사가 실렸고 에밀 졸라도 복권되어 프랑스로 돌아오게 된다.
드레퓌스는 재심을 받기 위해 억겁의 세월과도 같았던 4년만에 프랑스로 돌아온다. 하지만 재심에서도 드레퓌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말았다. 그러자 이제는 세계 각국이 한 목소리로 프랑스를 규탄하기 시작했고 대외적 여론의 압박에 못이긴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를 특별사면한다. 특별사면은 무죄가 아니라 형 집행정지에 불과했기 때문에 피카르는 드레퓌스에게 재심을 권하지만 지친 드레퓌스는 사면을 받아들인다. 사실 살아돌아온 것만도 기적인 당시 드레퓌스의 입장에서 명예를 생각한다는 것은 사치에 불과할 수도 있었으리라.
드레퓌스는 사건 발생 후 12년이 흐른 1906년 대법원 항소심을 통해 비로소 공식적으로 무죄를 선고받게 되고 군에도 소령 계급으로 복귀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국방장관이 된 피카르와 만난 드레퓌스는 자신이 근무하지 못한 세월을 감안할 때 현재 자신은 중령이어야 마땅하다며 승진을 요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드레퓌스는 담담히 답변에 승복하고 뒤돌아섰고 두 남자는 이후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각자 상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품은 채로 그렇게 영원히~~
사건의 타이틀은 드레퓌스의 이름을 인용했지만 실제로 사건이 진행된 구체적 양상을 보면 ‘주연’은 단연 피카르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피카르의 문제 의식이 없었더라면 당시 프랑스의 상황으로 보아 사건의 진실은 영원히 은폐될 가능성이 높았다. 영화 역시 피카르의 모노 드라마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피카르의 투쟁에 초점을 맞췄다. 사건의 전말은 수많은 문서와 영상물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진실을 향한 한 사람의 투쟁과 고뇌에 주목하고 인물의 내면 서사에 공감하며 시청한다면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은 작품이다. 게다가 연기자와 실제 인물의 외모 ‘싱크로율’도 제법 높았고 대사도 프랑스어라 작품에 더 몰입하며 볼 수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지난 2000년 발생한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피살사건에서 10대 청소년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훗날 진범이 잡혔고 결국 사건 발생 16년이 지나 최초 피의자가 무죄임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재심을 맡은 박준영 변호사에 의해 진실이 밝혀질 수 있었으며 박 변호사는 이 외에도 몇 건의 재심 진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사건 역시 ‘재심’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피카르와 박준영은 100년의 세월과 지리적 거리를 두고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피해자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이 손상되었고 상처받았다. 당시 드레퓌스를 유죄로 몰고 간 사람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군은 증거 조작도 인정하지 않았다. 100년 가까이 지난 1998년에 와서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드레퓌스와 에밀 졸라 후손들에게 공식 사과 서한을 전달하며 프랑스 정부는 비로소 잘못을 인정했다. 박준영 변호사가 재심을 맡아 ‘뒤집은’ 사건의 피해자들 역시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 그나마 드레퓌스와 졸라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 덕에 비교적 평탄하게 훗날을 살아가기라도 했지만 한국의 억울한 피해자들은 생계조차 막막한 실정이다.
우리는 국가란 진실과 정의를 믿으며 국민을 보호한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거대 권력의 이름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탄압했던 사례는 역사에 비일비재했으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다소 진지하고 무겁고 불편하더라도 우리는 드레퓌스 사건을 비롯한 역사의 오류들을 수시로 떠올리고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일그러진 분노가 상식과 정의가 쌓아올린 벽을 무너뜨리고 다시금 불행한 비극을 낳을 수 있다. 피카르가 보여준 진실을 향한 불굴의 의지와 드레퓌스가 치욕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보여준 인내는 그야말로 기적이며 그저 빛이었다.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되풀이한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