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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May 15. 2023

현대전자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대전 현대가 전주 KCC가 된 이야기

2001년 3월 13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6강 플레이오프 2차전은 접전 양상이었던 1차전과는 달리 일찌감치 승부가 갈렸다.  원정팀 청주 SK가 2연승하며 4강에 진출했고 홈팀 대전 현대는 시즌을 마감했다. 그런데 현대에게 이 경기는 단순한 아쉬움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현대가 단순히 해당 시즌을 넘어 아예 프로농구 리그와 이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기는 대전 현대라는 이름으로 치르는 마지막 경기가 되어 버렸다.


유니폼의 ‘네오미’는 당시 출시된 현대전자의 마지막 휴대전호


 현대 농구단은 1980년대 농구대잔치에서 여러 차례 우승했고 프로 출범 이후에도 직전 시즌까지 정규리그 3연패에 2차례의 통합 우승을 일군 명문 구단이었다. 실업에서 프로에 이르기까지 거쳐간 전/현직 선수만 해도 신선우, 이원우, 박수교, 이충희, 이문규,이상민, 추승균, 조성원 등 국가대표를 거친 스타플레이어들로 넘쳐날 정도이다. 다행히 ‘범현대가’의 일원인 금강고려화학(현 KCC)이 대전 현대를 인수했고 연고지를 전주로 이전하여 전주KCC이지스라는 이름 하에 계속 리그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구단도 아니고 현대라는 팀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농구계와 팬들에게 적지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 현대의 마지막 경기 이전인 2월 말 이미 금강고려화학의 대전 현대 인수 소식이 전해졌다. 아래 해당 기사)

https://n.news.naver.com/article/008/0000055349






 


 대전 현대의 퇴장 이면에는 실업 시절이던 1989년부터 프로 출범 이후까지 남자 농구단을 운영했던 모기업 현대전자의 몰락이 있었다. 현대전자는 1980년대 중반 금성사(현 LG전자), 삼성전자, 대우전자의 3강이 주도하고 있던 전자업계에 후발주자로 뛰어들었다. 가전제품으로 경쟁하기 어려웠던 현대전자는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인 컴퓨터와 반도체에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1985년부터 메모리 양산을 시작했으며 1990년대 중반 PC보급 바람을 타고 ‘멀티캡’이라는 PC를 출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공격적인 투자가 이어졌고 이는 반도체 부문에서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시기적으로도 호경기가 이어지고 있어 현대전자의 앞날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현대의 승부수는 냉장고,TV, 오디오가 아닌 컴퓨터였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만나면서 재계 전체가 크게 휘청대기 시작했다. 현대그룹 전체가 어려움을 겪는 판에 그동안 반도체 부문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던 현대전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정권의 특혜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1998년 LG반도체를 인수/합병했고 1998년 걸리버에 이어 2000년 네오미라는 이름의 휴대폰을 출시하기도 했으나 경영을 정상화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닷컴버블 붕괴라는 폭풍을 만나게 되어 빚 10조 원을 지고 결국 채권단으로 넘어가 버렸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만 해도 현대전자는 현대자동차보다 위상이 높았고, 당시 재계를 달구었던 일명 현대가 ‘왕자의 난’에서 현대자동차를 받았던 정몽구가 동생 정몽헌이 현대전자를 받은 것에 크게 반발했을 정도였다.



결국 2001년 4월 현대전자는 하이닉스 반도체로 사명을 바꾸었고 메모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업부를 전부 분사시켰으며 8월에는 현대그룹에서 분리되어 별도의 길을 가게 된다. 대전 현대가 전주 KCC로 바뀐 것이 바로 이 무렵이며 봄에서 여름을 거쳐 인수 및 창단 작업을 마치고 2001-2002시즌부터 전주체육관에서 경기를 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하이닉스는 이후에도 적자를 면하지 못했고 후원하던 프로야구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는 단초를 제공한다. 결국 2011년  SK그룹에 인수된 후에야 하이닉스는 오늘날의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KCC의 역사는 ‘왕회장’ 정주영의 21살 차이 막내동생 정상영 창업주가 서울 양평동에 '금강스레트공업(주)'을 세운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에는 석면 슬레이트 지붕 같은 건자재를 만들었고 점차 부산과 대구 등 지방으로 영업조직을 확대했다. 이후 서울 저동에 사옥을 마련하고 1973년 증시에 상장했고 ’금강‘으로 사명을 바꾸며 종합 자재 기업으로 입지를 굳혔다. 2000년에는 1974년에 설립된 건축용 도료제조업체 고려화학과 금강이 합쳐 ’금강고려화학‘(KCC)이 출범한다. 2022년 3월 기준으로 KCC그룹은 재계 서열 37위이며 건자재, 도료, 유리, 실리콘, 건설 등의 분야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대전 현대가 전주 KCC로 거듭난 데에는 KCC 창업주 정상영 명예회장의 농구 사랑이 큰 역할을 했다. 상술한 바와 같이 2001년 당시 현대전자는 더 이상 농구단을 운영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인수 기업조차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정 명예회장이다. 덕분에 KCC는 계속 리그의 강호로 군림할 수 있었고 21세기 들어 3번의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일구어낸다. 이상민, 조성원, 추승균, 정재근이 은퇴한 이후에 하승진, 강병현, 전태풍, 임재현, 신명호 등이 드래프트와 트레이드를 통해 합류하여 명문구단의 면모를 이어간다. 2005년에는 선수 은퇴 후 1년이 지난 허재를 감독으로 전격 기용하여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5년생 동갑내기 하승진-강병현은 KCC 2세대를 대표하는 원투펀치였고 2번의 우승을 함께했다



형이 감독님이라고? 당시 조성원은 ‘아빠’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느낌이라는 말로 허재 감독을 맞는 소회를 대신했다.


창업주 정상영 회장은 농구 명문으로 유명한 용산고 출신이며 아들 정몽익 현 구단주와 최형길 단장, 신선우 초대 감독, 허재 전 감독, 전창진 현 감독 등 구단의 주요 인사들도 용산고 출신이다. 그야말로 농구에 ‘진심’일수밖에 없는 구성이다. KCC가 매년 오프 시즌마다 공격적인 투자로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는 든든한 자금력도 있지만 창업주에서부터 내려오는 농구 사랑도 무시못할 이유로 꼽힌다. 이런 탓에 2021년 초 정상영 회장이 별세했을 때 선수단과 현장 스탭, 응원단은 검은 띠외 근조 리본을 달고 검은 정장을 입어 고인에 대한 예를 지켰다. 응원도 최소화하여 치어리더의 공연도 없었다. 팬들 역시 SNS와 각종 채널을 통해 고인을 추모하며 안타까워했다.


정상영 회장은 틈날 때마다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을 독려하고 ‘승리요정’이 되었다. 2004년 우승 이후 선수들에게 행가래를 받는 정 회장;ㅣ










전주 연고로 22번의 시즌을 치르는 동안 KCC이지스는 전주 시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스타 플레이어들이 뛰며 좋은 성적을 낸 탓이 가장 크지만 프로야구 쌍방울 레이더스의 이탈 이후 전주시민들이 스포츠에 목말라 있던 차에 ‘투입’된 타이밍도 좋았다. 한때 전주체육관 밖에는 경기장에 입장하지 못한 팬들이 대형 모니터 앞에서 ’거리 응원‘을 펼치는 모습이 큰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경기가 있는 날에는 ‘당연히’ 주차난으로 몸살을 앓는다.


20년간 농구의 성지이자 전주의 명소로 자리매김한 전주체육관


이렇게 팬들로 가득찼던 전주실내체육관은 건립 50여년이 지나 노후화했고 2025년부터 KCC는 신축 체육관에서 경기를 하게 된다. 신축 체육관은 전주 월드컵경기장 남쪽에 지어지는데 주차장은 크게 늘어나는데 반해 관람석은 여전히 5천석이라는 점이 다소 아쉽다(최근 프로농구와 프로배구의 열기를 보건데 1만석 가량은 필요하다는 게 개인적 ‘팬심’이다).


전주종합스포츠타운 내에 지어질 신축 전주체육관 조감도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어린 가정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 많은 사건 중 하나의 결과만 바꿔도 수많은 인물과 단체의 운명이 연쇄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현되지 않은 꿈에 누군가는 아쉬워하고, 일어날 뻔 했던 참사가 없었음에 누군가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현대전자가 몰락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일어났을지도 모를 사건들을 ‘뇌피셜’로 예측해 보았다.


현대그룹은 현대차그룹보다 우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대전자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이 세상이 나왔을수도 있다.

SK그룹의 재계 서열은 지금보다 낮았을 것이다

현대는 계속 대전에 머무르며 충무체육관을 홈으로 썼을 것이다(물론 모 구단처럼 수도권으로 엑소더스했을수도 있다)

2005년 출범한 프로배구 삼성화재와 KGC인삼공사의 연고지는 대전이 아닌 다른 곳으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전주시는 농구가 아닌 배구 프로구단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현대 유니콘스는 해체되지 않았을 것이다(설령 해체되었다 해도 그때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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