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리는 것들

사라져서 남는 것들

by 이운덕

여행을 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들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중심이 아니라 그 반대편, 조금은 어둡고,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 자리. 요란한 간판의 뒤편, 복잡한 시장 골목의 끝자락, 혹은 해가 지고 난 뒤 텅 빈 광장 한가운데. 그런 곳들에서야 비로소 세상이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사진을 찍다 보면 종종 그런 순간을 맞이한다.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어중간한 시간, 어딘가로 급히 사라지는 발소리들이 잦아든 뒤에 남은 정적 속에서다. 그때 카메라를 들고 바라보면, 그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물들이 보인다. 먼지를 뒤집어쓴 의자, 문득 햇살이 비껴든 창문, 바람에 흔들리며 낡은 간판을 붙들고 있는 녹슨 나사 하나.

DSC_3126.JPG 노르웨이, 플롬선 산악철도

그것들은 마치 세상이라는 무대의 조연처럼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도드라지지 않지만 없으면 허전한 존재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아도 묵묵히 제 일을 해내는 그것들을 볼 때면 묘한 안정감이 생긴다. 세상이 온통 변화와 속도만을 외칠 때 그들은 느리게, 그리고 조용하게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사라짐을 배우는 시간


얼마 전, 평소 즐겨 쓰던 볼펜 한 자루를 잃어버렸다. 작은 플라스틱 몸통에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오랫동안 손에 익은 무게와 필감이 있었다. 사소한 물건 하나였기에 금세 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사라지고 나니 이상하게 그 손끝의 감촉이 떠올랐다. 책상 서랍을 열어보고, 가방 안을 뒤적여봐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 볼펜이 내 곁을 완전히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이런 일이 잦아졌다. 열쇠, 손수건, 작은 노트, 때로는 그보다 더 소중한 것들. 예전에는 잊지만 않으면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던 것들이 요즘은 금세 나를 떠나버린다. 무심코 둔 마음과 게을러진 주의가 그들을 떠나보내는 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혹시 내가 ‘잊는 법’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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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사라짐에도 익숙했다. 계절이 바뀌면 꽃이 지고, 친구가 먼 곳으로 가고, 물건이 낡으면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물건이, 한 장의 사진이, 혹은 짧은 인연 하나조차도 내 삶 한 부분을 상징하는 듯 느껴졌다. 그래서 그중 하나라도 사라질 때면 마치 나 자신이 조금씩 깎여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존재의 흔적들


사진을 찍는다는 건 사실 일종의 ‘붙잡기’다. 사라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누르고, 잊힐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남긴다. 하지만 렌즈를 통해 바라본 세계는 아이러니하게도 늘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도 빛은 이미 바뀌고, 사람의 표정은 지나가버린다. 순간은 포착되는 대신 지나간다.

그래서일까. 사진을 찍으며 느끼는 감정은 늘 아련하다. 한 컷을 남기면서도 그 뒤에 드러나는 ‘잃어버림’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들게 되는 이유는, 그 상실을 통해 비로소 어떤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DSC_8817.JPG 쿠바, 아바나

길모퉁이의 낡은 벤치나 버려진 간판 앞에서도 그런 감정이 스며든다. 누군가의 손때가, 발자국이, 시간이 묻은 자국이 느껴진다. 그것은 사라진 것들이 남긴 잔향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존재를 느끼고, 시간이 흘러도 무언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어쩌면 그런 것이다. 오래도록 연락이 닿지 않던 친구, 한때 자주 마주하던 이웃, 혹은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를 누군가. 세월이 지나며 저마다의 길로 흩어지고, 마음을 나누던 시간들은 점점 흐릿해진다. 하지만 문득 어떤 거리의 풍경이나 오래된 음악 한 구절에서 그 시절의 온기를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남은 것이다.

사람을 잃는다는 건 그 사람의 부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함께 있던 나의 한 부분도 사라지는 일이다. 그래서 떠나간 자리에 남은 빈틈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빈틈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 안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새로운 시간이 쌓인다. 상실은 그렇게 새로운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준다.


잃어버린다는 감각


‘잃어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없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로부터 멀어지는 시간의 감각이다. 클릭 한 번이면 저장되고 복사되는 세상에서, 진짜 잃어버림은 오히려 더 진귀한 경험이 되었다. 모든 게 기록되고 남는 시대에 ‘사라짐’은 역설적으로 삶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래서 가끔은 일부러 놓아두기도 한다. 돌아오지 않을 여행기 한 장, 닳은 구두, 오래된 편지. 그것들을 완전히 놓아버릴 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비로소 온전히 나의 일부가 된다. 잃어버린다는 건, 어쩌면 그렇게 ‘완성’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잊는 법’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곧 ‘그리움’을 놓지 못하는 일이라고. 누군가를 잊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 사람이 내 안에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리움이 삶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그래서 조금은 의식적으로 ‘잊는 연습’을 해보려 한다. 다만 그것은 차갑게 지워내는 일이 아니라, 따뜻하게 놓아주는 일이어야 한다. 마치 오래된 나뭇잎이 제 스스로 바람에 실려 떨어지듯이 그렇게 잊고, 비우고, 다시 채워가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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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에서 다시 만난 세계

사진첩을 열면, 이미 지나간 순간들이 조용히 빛난다. 그중에는 한때 잃은 줄 알았던 것들도 있다. 오래전에 찍어 둔 골목의 벤치, 이름 모를 창가의 그림자, 여행 중 스쳐간 노인의 얼굴.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다시 보면 그 장면들은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DSC_9178.JPG 페루, 쿠스코

어쩌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인연은 그렇게 서로를 기다리며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외면했을 뿐, 그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다만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아 잠시 잊힌 것뿐이다. 사진은 그 잃어버림을 되돌리는 방식이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 잊혔던 존재들에게 빛을 다시 건네주는 행위. 그것이 사진이라는 언어가 가진 근원적인 다정함이다.


사라져서 남는 것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 중 몇 가지는 사실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형태는 사라졌지만 감정과 기억의 결이 되어 스며 있다. 그 볼펜의 묵직한 필감처럼, 여행길에 만난 낯선 바람처럼, 한때 나를 향해 웃어주던 누군가의 얼굴처럼 세상은 잃어버림의 연속이지만, 동시에 만남의 연속이기도 하다. 하나를 놓으면 또 하나가 찾아온다. 그렇게 삶은 ‘잃음’과 ‘얻음’의 균형 위에서 굴러간다.

여행을 다시 나오면 여전히 그렇다. 사람들 눈길이 닿지 않는 곳, 그늘 속에서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것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세상은 요란하게 변하지만, 그곳에는 늘 변치 않는 ‘기다림’이 있다. 그것들은 말없이 존재로서만 나를 가르친다. ‘잃어버리는 일도 나쁘지 않다’고, ‘사라짐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고.


잃는다는 건, 결국 살아 있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세상에 남겨진 모든 것들, 그리고 이미 잃어버린 것들 모두가 그렇게 내 삶을 완성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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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_2965.JPG 크루아티아 달마시안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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