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머무는 곳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해

by 이운덕

숨을 들이마시면, 낯선 흙냄새가 폐 깊숙이 스며든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남기고 간 숨결이, 아직 이곳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십자가의 숲, 리투아니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리투아니아의 십자가의 언덕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무 언덕 위에,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다. 금속과 나무, 녹슨 못과 바랜 묵주가 서로 뒤엉켜, 마치 수많은 기도가 한꺼번에 굳어버린 풍경 같다. 언덕 입구에서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주변의 소음은 사라지고 있었다. 기억을 담은 바람만이 함께하고 있지만, 그 바람의 소리마저 또 하나의 침묵으로 다가왔다. 말을 걸면 깨져버릴 것 같은 공기가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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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마다 십자가를 하나씩 쥐고 언덕을 오른다. 그 손 안에는 이름이 적힌 종잇조각, 짧은 기도문, 혹은 오래된 사진이 들어 있다. 누군가는 병든 가족의 이름을, 누군가는 돌아오지 못한 연인의 얼굴을, 또 누군가는 스스로를 향한 용서를 십자가에 묶어놓고 돌아선다. 언덕 위에서 뒤돌아보니, 내가 지나온 길이 보이며, 언덕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서늘한 바람사이로 수천 개의 십자가가 서로 부딪히며, 새로운 숨결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기도가 말이 되기 이전의 떨림, 입술이 움직이기도 전에 목젖에 맺히는 뜨거움이, 이 언덕 위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는 죽음은 더 이상 무서운 단어가 아니다. 그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이 쌓아놓으며, 조용히 눈을 감고 누군가의 울음과 또 다른 누군가의 웃음을 바람 사이로 스며드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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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십자가, 두브로브니크

두브로브니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올라가는 좁은 길 사이로 돌무더기와 마른풀 사이에 나무 십자가가 하나 서 있다. 십자가 아래 하얀 석재 블록 위로 작은 돌들이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고, 그 곁에 바랜 양초 하나가 기울어진 채 놓여 있다. 십자가에는 단 하나의 표식, “XIV”라는 로마 숫자만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이름도, 날짜도, 사연도 없이 그저 “십사 번째”라는 차가운 번호만이, 이곳에 잠든 사람을 대신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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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장치조차 제대로 허락받지 못한 채, 한 사람의 삶이 숫자 하나로 정리되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바람을 마찰음으로 적시며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여기 한 명 더 있었어요.”라고 속삭여주기를 원하는 듯하다.

이름 없는 십자가는, 어쩌면 우리 삶의 또 다른 얼굴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얼굴과 이름 속에서도, 때때로 우리는 서로를 제대로 부르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간다. 기억한다는 말이 이토록 어렵다면, 최소한 잊히지 않도록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일이라도, 그 앞에서 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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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페론의 잠든 자리,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고레타 묘지는, 죽음보다 삶의 냄새가 더 짙게 풍기는 장소다. 화려한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골목처럼 이어진 묘지 사이사이로 사람들의 발자국이 끊이질 않는다. 돌로 지어진 작은 집들, 화려한 조각상과 무거운 철문들은, 마치 또 하나의 도시를 이루는 건물들 같다.

그 도시의 한가운데, “에바 페론”이라는 이름이 있다. 아르헨티나 시민들에게 ‘에비타’로 더 많이 불리는 여성, 가난한 이들을 위해 싸우고, 독재와 혼란 속에서도 사랑과 분노를 동시에 한 몸에 안았던 사람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묘 앞에는 꽃과 편지, 작은 국기가 끊이지 않는다.

묘 앞에서 사람들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누군가는 조용히 십자가를 긋고, 누군가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그 앞을 그냥 지나친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모두가 같은 한 사람을 향해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에바 페론의 묘 앞에서 느낀 것은, 화려한 영광이나 권력의 흔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많은 타인의 마음을 통과해 지나갔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어쩌면 기억이란, 남겨진 자들이 품고 사는 작은 불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생전의 그 모든 호흡들이 모여, 묘지 골목에 보이지 않는 온기를 만든다. 죽은 자의 공간이라 부르기에는, 이곳의 공기가 너무도 살아 있고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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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머무는 곳에서

세 곳의 묘지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언덕은 수천 개의 기도로 이루어진 숲이었고, 두브로브니크의 십자가는 잊힌 한 사람을 대신해 서 있는 작은 표식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묘지는, 한 사람의 이름을 둘러싼 집단적인 기억의 광장이었다.

그러나 그 세 장소가 남겨준 감정은 묘하게도 닮아 있었다. 모두가 이미 떠나버린 이들을 위한 자리였지만, 정작 그 자리에 서 있던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숨이었고, 바람 사이, 돌과 나무 사이, 꽃과 편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누군가의 호흡을 느꼈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 말하지만, 이곳들에서 오히려 삶의 밀도를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남겨진 자들이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숨을 불어넣는 한, 죽음은 완전한 공백이 되지 못한다.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지 못한 삶이라 하더라도, 언덕 위의 이름 없는 십자가처럼, 세상은 어딘가에 작은 흔적 하나쯤 남겨두고 마는 것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는 종종 유명한 관광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화려한 건축물, 유명한 미술관, 맛집과 쇼핑 거리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는 장면들은 대개 그 화려한 장소가 아니다. 사소하고 조용한 순간들, 누군가의 숨결이 내 숨과 부딪히는 듯한 감각이 남는다.


십자가의 언덕에서 낯선 이들의 슬픔과 기도가 내 어깨 위에 가만히 내려앉는 느낌을 받고, 두브로브니크의 이름 없는 묘 앞에서는 어느 날 문득 나 또한 누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갈 것이라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다는 사실의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에바 페론의 묘지 골목에서는, 누군가의 이름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또 얼마나 무거운 책임인지 생각했다.


결국 여행이란, 다른 이들의 삶과 죽음이 남긴 숨결 사이를 잠시 걸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훔쳐보듯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거울을 본 사람처럼 자기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성실하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는 하루를 살고 싶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잊힌다는 것은, 모든 잘못과 서투름 또한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뜻이니까 실수투성이의 하루를 보내지만, 먼 훗날의 나는 그저 오래된 사진 속 한 장면으로만 남을 수도 있다.


스쳐 지나간 여행자의 뒷모습일지라도, 그 사진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잠시 숨을 멈추고 마음 한편을 쓰다듬게 만드는 장면으로 남아서 계속해서 걷고, 바라보고, 숨을 들이마시고, 사라져 가는 것들을 위해 오늘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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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