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하루에 걸려 넘어지다.

by 이운덕

외로움은 전염된다고 했다. 몇 년 지나지 않은 그 시절, 우리는 서로의 고독 속에서 마스크를 썼다. 거리를 두고 숨을 고르던 그 시절의 우리에게,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것은 ‘단절’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외로움이 가셨다고 해서 곧바로 행복이 밀려온 것은 아니었다. 마치 비가 그쳤다고 해도 여전히 흙내가 남아 있듯, 마음속 어딘가에는 아직 젖은 부분이 남는다.

외로움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길다. 그러나 그 그림자마저도 자신을 만들어가는 어둠의 일부라는 걸, 이제는 조금씩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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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향수와 닮았다고 한다. 자신의 맥박 위에 몇 방울 떨어뜨리지 않으면, 그 향은 오래가지 못한다. 살면서 종종 타인의 행복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들의 미소와 균형 잡힌 하루, 낯빛까지 부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뿌리지 않은 향기는 내게 묻지 않는다. 행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먼저 ‘허락’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조금씩 배워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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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한편에서 작은 향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그 기운이 조용히 퍼져나가 주변을 덮는다. 그런 날이면 바람결에도 미세한 따뜻함이 깃든다. 나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된 온도가 누군가의 하루를 녹이는 순간이 있다.

일하는 것이 전부인 적도 있었다. 열심히 달리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쉼 없이 달리기만 하면서 결국 삶의 숨결이 메말라간다.

여행이 필요한 이유는 어딘가 낯선 곳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쉬어가기 위함이다. 인생의 더위를 피해 나무 아래에서 한 모금의 그늘을 찾듯이 그 한 점의 쉼표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가끔 창가에 기대앉아 햇빛이 천천히 흘러가는 걸 관찰해 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후, 그것도 하나의 여행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멈춰 선 시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에야 지친 마음이 치유될 때, 행복은 이미 내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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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코끼리는 말뚝에 묶여 자란다. 자라나 말뚝을 뽑을 만큼 힘이 세져도, 여전히 그 근처를 벗어나지 못한다. 습관처럼 포기하는 법을 먼저 배워버린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이미 벗어날 수 있는데도, 예전에 세운 한계 안에서만 머문다. 그 말뚝은 타인이 박은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박아둔 경우가 더 많다. 언젠가 '말뚝을 빼낼 날이 오겠지'라는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아주 조용한 순간에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오래된 기억의 한 장면, 혹은 단 한 번의 ‘하루’가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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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모여 놀자."
수화기 너머 구순 아버지의 목소리
하루라는 그 시간에 자꾸 걸려 넘어진다.

시인 최영랑은 이렇게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구순의 아버지 목소리에 마음 한편이 젖는다. 하루라는 짧은 문장은 묘하게 무거웠고, 속절없이 슬픈 단어로 다가온다.


그 짧은 하루에 걸려 넘어지는 날이 있다. 일어나지 않고 한없이 기울고 싶은 시간. 아버지의 음성 속에 그 모든 하루가 다 녹아 있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하루는 덧없이 짧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기다려지는 길고 긴 시간이다. 그래서 하루라는 단어는 언제나 기쁨과 슬픔의 경계에 서 있다.

넘어짐이 그리운 날, 우린 하루의 끝자락에 기대어 다시 기억을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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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길 위에서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걷는다. 어떤 이는 빠르게 달리고, 어떤 이는 멈춰 선다. 하지만 결국 향하는 방향은 대체로 비슷하다.

조급하지 않고, 조금 느리게 가도 괜찮다. 하루는 여전히 충분히 길고, 우리가 느릿하게 숨을 고를 만큼의 시간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의 하루 속에는 여백이 있고, 그 여백 덕분에 오늘이 내일로 이어진다.


잠시 멈춰 바라본 햇살 한 조각, 카메라에 담은 먼 풍경, 따뜻한 커피의 온기들,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서 ‘나의 하루’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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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우리는 어쩌면 내일의 기억을 훔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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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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