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그림 찾기

빛바랜 아름다움

by 이운덕


와비(侘び)
시골이나 자연 속의 소박하고 고요하며, 검소한 삶의 태도에서 오는 평온함과
아름다움.

사비(寂び)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낡고 바랜 듯한 자연스러운 멋, 시간의 흔적과 무상함에서 느껴지는 고독하고 깊은 정취.


자연스러움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는 와비사비(侘び寂び)라는 미학 용어에서 지나온 많은 여행의 장면들이 조금 더 천천히 떠오르게 된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오래 남는, 그런 기억들의 흐름들이다. 여행에서의 와비사비는 완벽하지 않고(imperfect), 영원하지 않으며(impermanent), 미완성된(incomplete) 것들 속에서 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지혜로 다가온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왜 하필 가시가 돋았을까 생각하면 잠깐 서운해지며, 꽃과는 조금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만드는 가시들에게 서운함을 느끼지만,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그 가시 끝에서 저토록 깊은 붉은 꽃잎이 피어나게 만드는 힘은 꽃의 화려한 향기가 아니라 조용히 서 있는 가시일지도 모른다는 법정스님의 말씀에 공감을 가지게 된다. 잠시 생각을 바꾸어 보면 장미와 가시는 더 이상 서로의 결점을 드러내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한 쌍이 되어 주는 것이다.

여행도 그러했던 것 같다. 여행을 떠나기 전, 마음속에 한 장의 그림을 미리 그려 보면서 맑은 하늘, 색감이 또렷한 건물들, 낯설지만 친절하기만 한 이방인의 모습을 그려보지만, 정작 낯선 곳에 도착하면 짐가방 바퀴가 익숙하지 않은 길 위를 덜컹거리기 시작하면서 예상했던 그림은 서서히 벗어 나가게 된다. 계획했던 동선은 늘 어딘가 비어 있고, 지도 위의 화살표는 생각보다 쉽게 방향을 잃게 한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 예상보다 일찍 문을 닫아 버린 가게, 시간표를 잘못 본 탓에 손만 흔들며 떠나보내야 했던 버스들이 기대 가득했던 여행을 아쉬움으로 가득 차게 만든다. 이럴 때 순간적으로 “이 여행은 실패인가” 하고 속으로 중얼거려 보기도 한다.

하지만, 와비사비라는 말이 천천히 귀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런 순간들이었다.

아이 때 즐겨하던 숨은 그림 찾기처럼, 여행은 늘 ‘보이지 않는 것’을 품고 있었다. 관광지도에서 굵은 글씨로 적힌 명소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 화려한 장소는 이미 누구에게나 알려진 답안지 같은 곳이었다. 정작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그 글씨와 글씨 사이의 여백,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들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선 골목에서 노을이 기울어 벽에 걸어 놓은 긴 그림자,

빗방울이 한 칸씩 번져 가는 오래된 창문 유리,
그 아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던 여행자 한 사람.

그 순간의 온도와 냄새, 익숙한 말이 한 마디도 섞이지 않는 공기 속에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느슨해지는 시간 속에서 새로움을 찾는다.

신기하게도 숨은 그림은 눈을 크게 뜨고 찾을수록 더 잘 숨어 버린다.

오히려 발걸음을 늦추고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을 때, 그제야 그림 속 구석에서 작은 표정 하나가 나를 향해 웃고 있다. 와비사비는 그 웃음을 알아보는 눈을 대신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어떤 벤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앉고 싶어 하는 자리로 남고, 어떤 벤치는 마른풀과 거미줄을 친구 삼아, 때로는 새벽 가득 눈을 맞고 그 자리를 지키기도 한다.

가끔은 빛이 닿지 않는 동안에도 세월은 조용히 쌓인다는 것을, 그리고 그 쌓인 시간 위에야 비로소 어떤 이야기가 앉을 수 있다는 것을 벤치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다 보면, 화려한 건물보다 살짝 흔들린 사진 한 장이 더 오래 눈에 걸릴 때가 있다. 초점이 어딘가 애매하게 흐려지고, 수평선이 조금 기운 바다, 사람의 얼굴이 반쯤 잘려 나간 스냅숏 등에서 그날의 바람과 웃음, 조금 서투른 말투까지 다시 떠올리게 된다.

와비사비는 실수를 끌어안는 미학이 되어준다.

기억 속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사람, 비가 오지 않았다면 들어가지 않았을 카페, 버스를 잘못 타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들이 처음엔 모두 ‘가시’처럼 느껴졌던 순간들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가시들이 가장 선명한 꽃이 되어 앨범 한쪽에 활짝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여행이 끝나면 다시 처음 떠나왔던 자리로 돌아오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 속에 함께 보낸 시간들이 고요하게 접혀 있다. 먼 곳에서만 찾던 와비사비가 사실은 늘 발밑에서 작게 인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부신 장면만을 모아 두는 것이 아니라, 빛이 닿지 않았던 모서리까지 함께 담아 “이것도 나의 여행이었다”라고 조용히 고백하는 글감을 모아 와비사비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불완전함을 불러 보려 한다.


오늘도 숨은 그림 속에서 세상을 다시 배우게 된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