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그러나 함께하지 못하는 길들
멈춤의 역, 문경 카페 가은역
꼭 햇살이 따스하지 않아도 좋았다. 비를 머금으며 수십 년의 세월을 온몸으로 껴안고 세모와 네모가 더한 모습으로 서있는 문경의 가은역은 추억의 박물관처럼 낯선 이방인을 맞이해주고 있다. 멈춰진 시간의 정취와 같은 커피 향을 맡으며 영화 〈스테이션 에이전트〉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세상과 조금 떨어진 역, 그리고 그곳으로 흘러들어온 고독한 사람들. 그들은 말없이 커피를 마시고, 가끔은 말없이 누군가를 이해했다. 사람들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고요한 움직임 속에서 ‘관계의 거리’를 보았다. 서로에게 닿지 못하더라도, 곁을 내어주는 일에는 또 다른 온도가 있었다.
도로 넘어 건너편 세월의 흔적이 깊이 새겨진 낡은 다방이 그 자리에서 굳건히 마을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화려하게 변신한 가은역 카페와 대비되면서도,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지게 된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함없이 남아있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랄까이 들게 된다.
기차는 다니지 않지만, 기찻길은 여전히 나란히 뻗어 있다. 서로 만나 본 적도 없지만 헤어져 본 적도 없이 목적지까지는 함께였다. 그것은 관계이고, 인생이고, 우리가 걸었던 길의 모양이다.
기차가 떠나간 자리에 바람이 분다. 그 바람 속에서 〈스테이션 에이전트〉의 피니가 말없이 웃던 표정을 떠올린다. 그의 고요 속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시베리아 / 환바이칼의 길 위에서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크까지 9,300Km에 이르는 대장정의 노선에 스며들었다. 여행지의 분위기에 맞추어 사람들은 말없이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며, 누구도 아무 말을 하지 않지만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는 그 느낌들이 창문사이로 희미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기차는 쉼 없이 흔들렸고, 바이칼 호수는 조용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호수와 하늘 사이 하늘과 호수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세상이 투명하게 보이는 시점 기차는 멈춰 섰다. 무수한 은빛 자작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지며 서사적인 기운이 문명에서 벗어난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 누구나 마음속 어딘가에 그렇게 떠나고 싶어 했던 시간을 품고 살아왔던 대지에 여행자의 따뜻한 시선이 멈춘다.
플롬바나 산악열차
노르웨이의 산악기차에 올랐을 때, 기차는 구름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함께
산의 그림자가 천천히 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소외’의 의미를 곱씹었다. 때로 외로움은 결핍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고 있었다. 마치 바람이 레일을 따라 부딪히는 소리처럼 혼자 있음 속에서만 들리는 야생 그대로의 소리가 있다.
오르세 미술관, 시간의 역에서
파리의 오르세는 여전히 ‘역’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거대한 시계 아래, 사람들은 천천히 걷고, 그림은 조용히 흐른다. 한때 기차가 오가던 플랫폼에는 이제 시간이 전시되고 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침은 계속 움직이지만, 이 공간의 공기는 멈춰 있었다. 그 순간, 멈춘다는 건 사라지는 게 아니라, 한 장면으로 남아 누군가의 기억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정의 끝, 그리고 다시 출발
여행은 마쳤지만, 나는 내 안에도 작은 역 하나가 있음을 느꼈다.
사람들이 스쳐가고, 가끔은 머물다 떠나는 기차역에는 멈춤과 기다림, 그리고 한때 나란히 걷던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기차처럼, 그리움도 결국은 계속 달리는 중이었다. 언제나 누군가의 곁을 따라 나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