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의 미학

발자국의 기억

by 이운덕

칸쿤의 아침은 소리 없이 깨어났다.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은빛의 빛살이 바다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고, 햇살은 신의 손끝처럼 수면 위를 스치며, 고요를 깨우기보단 다독이듯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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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숨을 고르는 듯 조용했고, 파도는 낮은 숨결로 모래 위에 고백을 밀어놓았다.

나는 그 해변의 입구에서 신발을 벗었다.

발끝이 닿는 모래의 감촉은 따뜻했고, 어딘가 슬펐다.
햇살이 금빛으로 번지던 그 길 위에는 리조트의 그림자들이 늘어져 있었고, 사람들의 꿈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채 물결 속에 묻혀 있었고, 그 틈바구니에서 나는 홀로 걸었다.
내 그림자조차 한 걸음 뒤처진 채, 바다의 숨결만이 나를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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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딛는 매 순간, 모래는 고요히 움푹 꺼졌다. 어떤 발자국은 곧게 이어졌고, 어떤 건 엇나갔다. 그 불균질 한 궤적이 마치 내 삶의 단면처럼 느껴졌다.
모래는 말이 없었고, 그저 내가 지나간 자리를 부드럽게 품었다. 그때 문득 생각이 스쳤다.

“삶이 무거울수록, 발자국은 더 깊어진다.”

말보다 먼저 가슴이 먼저 울렸다. 나는 내내 가볍게 살아오려 했지만, 사실은 무겁게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희망을 가장해 버텼던 날들, 웃음을 흉내 내던 시간들, 그 모든 게 내 발 밑에서 잔잔히 무너지고 있었다.
칸쿤의 모래는 내 무게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게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결국 삶이란, 나를 무겁게 만드는 것들을 버리느냐 품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걸음을 멈추자, 파도가 발끝을 적시며 속삭였다.


"조금은 괜찮아져도 된다"

그 단순한 위로가 낯설게 따뜻했다. 인생에서 가장 정직한 흔적은 말이 아니라, 발자국이 되어주었다. 말은 쉽게 변하지만, 걸음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방향, 그 속도, 그 깊이, 그것이 모여 내가 살아온 방식의 기록이 되어주었다. 길을 재촉하지 않을 때 비로소 길이 내 안에 들어온다.

걷는다는 건 어쩌면 세상을 향한 침묵의 기도다.


나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람의 결을 함께 느꼈다. 그 모든 감각이 “지금”을 증언하고 있었다.

“지워질 걸 알면서도 우리는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사라져도 괜찮다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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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을 혼잣말처럼 되뇌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을 디딜 때마다 모래는 조용히 나를 품어주었다.
그 품 안에서 나는 잠시 인간의 연약함을 받아들였다. 세상에 완전한 존재는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한참 뒤, 나는 뒤돌아보았다. 내가 남겼던 발자국들이 고요한 파도 속으로 하나씩 삼켜지고 있었다. 지워지는 모습은 쓸쓸했지만, 동시에 경건했다. 마치 자연이 인간의 흔적을 부드럽게 회수하는 의식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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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사라진다는 건, 끝이 아니라 순환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도는 발자국을 지우면서도 그 자리에 나의 시간을 묻어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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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모래는 비었지만, 내 안에는 충만한 여운이 남았다. 칸쿤의 햇살은 다시 깊어지고, 바다는 다시 빛을 품었다. 그리고 나는, 또 한 걸음을 내디뎠다. 사라짐의 끝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흔적으로 한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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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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