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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Oct 15. 2021

에필로그 : 나잇값은 넣어둬

내 꿈의 시작 '14살 영심이'


혹시 '14살 영심이'란 만화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대의 나이는 최소 30대 후반이란 말씀. 후훗.


내가 국민학생이었던 1990년 ( 1996년에 초등학교로 변경되었다.) 영심이는 세상이 등장했다. 난 TV 만화로 영심이를 처음 만났고 그때는 그저 가끔 보는 TV 속 만화일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영심이랑 같은 나이인 14세,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앞 서점에서 나는 영심이를 책으로 다시 만났다.


지금 생각하면 고작 14살짜리가 불과 몇 년 전에 봤던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책 표지를 보며 "내가 어렸을 때 봤던 만화가 책으로 나왔네"라고 무슨 대단히 추억에 잠긴 듯 한 표현을 쓰며 많지도 않던 용돈을 통 크게 책을 사는데 썼다.


책을 사서 돌아온 날, 꽤 늦은 시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숨죽여 깔깔 깔깔 웃으면서 책을 읽었다. 그전까지 난 책을 즐겨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영 안 읽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즐겨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스스로 읽고 싶은 책을 찾기보다 학교에서 독후감 숙제로 나오는 책들 위주로 읽어내었다. 읽는 것보다는 책장에 줄 서있는 책들을 더 멋있게 생각하는 아이 었고,  학교 도서관과 서점에 자주 가기는 했지만 책을 고르고 읽어 싶어서 라기보다 도서관과 서점이 주는 멋스러운 분위기가 좋아 찾아가는 아이였다. 그런데 영심이는 그런 나에게 책을 읽는 재미를 알려줬다.


책이란 게 이렇게 재미있는 거구나.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깔깔 웃을 수 있는 거구나. 늦은 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읽을 수도 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하며 나는 기뻤다.
영심이가 알려준 건 그뿐만이 아니다. 영심이는 나에게 읽는 재미뿐 아니라 글을 쓰는 즐거움을 알려주었다.


책을 다 덮고 난 감탄했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글을 사람이 썼다니. 이 글을 쓴 사람은 누구일까? 나도 써 볼 수 있을까?


난 지난 학기 쓰다 만 노트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나만의 영심이를 써보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명백한 표절이다. 글이라곤 써본 게 학교 숙제로 제출하는 독후감 혹은 주제에 맞게 써내는 글짓기가 유일했던 나이였다. 하물며 소설이라니. 내 소설의 구성은 영심이와 거의 흡사했다. 아니 똑같았다. 14살의 말괄량이 여학생과 그녀의 가족이 등장하고, 여주인공의 흡사 부하 같은 남자 사람 친구가 등장한다. 평범한 여중생의 좌충우돌 생활 내용. 등장인물들의 말투도 외모도 원작과 거의 흡사하다. 이건 뭐 거의 영심이의 새로운 에피소드 수준이다.


하지만 뭐 어떠랴 그 당시의 난 신이 나서 써 내려갔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도 참아가며 혼자 킬킬 웃으며 숨죽여 써 내려갔다. '세상에 나도 소설을 쓴다고!' 하면 신이 났었다. 그러다 친구에게 노트를 들켜버렸다. 친구는 뭘 그렇게 열심히 쓰냐고 물었고 난 무슨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소설을 쓰고 있다고 대답했다. 친구는 고맙게도 비웃지 않고 자기에게 보여 달라고 했고 난 선뜻 내 노트를 내어주었다. 친구는 한참을 내 소설을 읽어줬다. 그리고 중간중간 소리 내어 웃었다. 웃는 친구를 보고 난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친구는 재미있다고 다른 친구에게 내 노트를 소개해 줬다. 그렇게 대여섯 명의 친구들이 내 글을 읽었다. 친구들은 재미있다고 이야기해 주었고 다음 편을 빨리 내놓으라 재촉했다. 나는 그렇게 2주간 즐겁게 써 내려갔다. 그렇게 내 꿈은 소설가가 되었었다.


그러나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용기 있는 청소년이 아니었다. 결국 그 노트를 엄마에게 들켜버린 그날. 당장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엄마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타박을 했다.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하라고 네가 지금 이런 글이나 쓰고 있을 나이냐고,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그 한마디에 나는 소설가라는 내 꿈을 그동안 썼던 노트와 함께 고이 접었다. 그렇게 나의 첫 소설은 완결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누군가 내 글을 읽어 주고, 좋아해 주는 경험을 한 번 한 몸. 작가라는 꿈은 잊을 만하면 수면 위로 모습을 내보였다 다시 가라앉곤 했다. 머릿속에 재밌을 것 같은 이야기가 떠오를 때, 블로그에 쓴 내 글에 누군가 좋아요를 눌러줄 때, 내 글이 좋다고 지인들이 스쳐 지나가는 말로 해줄 때 그 꿈은 수면으로 올라왔다. 그러다 머릿속 이야기를 글로 다 풀어내지 못할 때, 글쓰기를 연속해서 해 내지 못할 때 그 꿈은 다시 가라앉는다.


그리고 이젠 내 꿈을 타박하는 사람은 엄마가 아닌, 나 스스로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글은 무슨 글이냐고, 그 시간에 자기 계발을 위해 하나라도 더 공부하라고, 지금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 꿈을 좇으려고 하냐고, 작가는 아무나 하냐고, 너 보다 더 열심히 쓰고 잘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 아냐고. 그렇게 스스로를 타박했다. 나를 타박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아마도 나이 일 것이다. 꿈이란 어린아이들만 꿀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했다. 젊음이 꿈을 이룰 수 있는 체력 같은 거라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주위 사람들보다 내가 더 스스로를 심하게 나이라는 밧줄로 옭아매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나의 sns에 내가 올린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에 세상 해맑게 웃으며 찍은 사진 아래에 내가 스스로 적은 문장. '나잇값은 넣어둬' 


생각해보니 세상 해맑은 표정 조차 나잇값을 따진 것은 나였다. 웃는 모습에 무슨 나잇값이 있다고 웃는 거조차 나이에 맞게 웃으라 스스로 말한 걸까. 내 꿈들을 입 밖으로 내뱉은 적 없으니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한 적 없을 텐데 난 왜 마치 세상이 나에게 나잇값이란 잣대를 대며 내 꿈을 막은 것처럼 굴었을까. 왜 내가 스스로 나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을까.


이제 남 탓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적은 문장처럼 나잇값은 넣어두기로 했다. 접어두었던 꿈들을 하나씩 꺼내볼꺼다.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또 어떠한가. 그저 아직 나이 뒤에 숨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뭐라도 해보면 적어도 나중에 후회는 하지 않을테니.


이젠 탓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안다.


그 첫 번째로 나는 글을 다시 써보기로 했다. 늘 읽기만 했는데 이제는 내 글을 써보자 마음먹었다. sns에 짧게 올리는 글 말고, 제대로 시작과 끝이 있는 글을 한 편씩, 한 편씩.

이번엔 노트 대신 컴퓨터를 꺼낸다. 그리고 떠오르는 이야기를, 생각을 글로 적어본다.


그 시작을 위해 맨 앞에 한 문장을 적었.

'나잇값은 넣어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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