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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Jun 12. 2019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지난 파리일기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멀리 있는 친구들과도 언제든 얘기를 나눌 수 있다. 예전은 안 살아봐서 모르겠는데 아마 친구 소식을 듣겠다고 꼬박 하루를 기다려야하는 때에 살았더라면 내 생활이 꽤나 고단했을 거다. 게다가 나나 내 친구들이나 시차를 모르고 밤이 새어 깨어있는 편이라 나에겐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보고싶은 사람들이랑 언제고 얘길 나눌 수 있는 거니까.


그 중 내가 아끼는 친구가 내게 노래를 추천해줬다. 내 마음에 꼭 드는 노래. 나는 기타 소리가 들리는 노래를 좋아한다. 그리고 잔잔한 보컬이 우울한데 안 우울한 척 하는 가사를 읊조리는 노래라면 내게 딱이다. 그 노래는 ‘9와 숫자들’의 ‘높은 마음’이라는 노래였는데, 역시나 우울한데 안 우울한 척하는 노래였다. 가사가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낮은 몸에 갇혀있대도 평범함에 짓눌린 인생이 사실은 나의 일생이라면’ 인 아무튼 우울한 노래다. 아무렴 노래를 들을거라면 ‘내 인생 최고!’, ‘나 너무 행복하다!’ 같은 노래보단 이런 게 낫지 않나. 아무튼 난 이런 노래들이 더 좋다.


이 노래를 추천받은 뒤부턴 일어나서 커피 마실 때, 화장하며 나갈 준비할 때, 잘 준비를 할 때 내 배경음악이 됐다. 잔잔하면서도 사람 마음 후벼파는 게 노래 들을 맛 난다. 자매품으론 김광석의 ‘맑고 향기롭게’가 있다.


아무튼 이 노래가 날 그저 스쳐지나가지 않은 이유는 내가 요즘 그런 생각을 해서다.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다짐하면서도 잘 되지 않아 절망하는 작은 순간들이 지나간다. 김영하 작가는 작가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읊조리는 소심한 목소리에 사실은 삶의 깊은 진실이 숨어있다고 했으니, 내 진실은 저런 노래를 들으면서 스쳐가는 찌질한 생각에 녹아있는 셈이다.



딴 얘기 1

나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다. 말을 시키면 할 순 있고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도 그닥 힘든 일은 아니지만 보통은 필요 이상으로 말을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해가 기울어질 때 쯤이면 내 기준에서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힘을 내어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굳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의지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때는 사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서다. 때와 장소에 맞는 말이 있다고 배웠는데 때와 장소에 내가 완전히 속하지 못했다고 느낄 때. 한 마디로 불편할 때. 그럴 땐 의도한 건 아니지만 말을 아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파리에 살면서 웬걸 때와 장소가 계속해서 바뀌어대니 나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서도 다니던 길로만 다니던 내가 여기선 때와 장소를 바꾸어 가면서, 또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사람을 만나대니 그게 나에겐 엄청난 압박이었던 거다. 아니, 무슨 말을 하라고? 꼭 말을 해야해? 남들 입장에서 보면 같이 술 마시기 좀 짜증날 수도 있다. 아니, 근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라고?



딴 얘기 2

그러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동네에 있는 피카소 뮤지엄엘 갔다. 칼더-피카소전이었고 전시를 시작한지는 꽤 오래됐지만 이놈의 게으름 때문에 몇 주를 미루다 오늘에야 가게 되었다. 처음엔 쇳덩이로 모빌 같은 걸 만들어 매달아놨길래 이게 뭔가 싶어서 열심히 보긴 했는데, 좀처럼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주의 정수를 보느니 마느니 하는 설명도 그닥 친절하지 않아서 몇 분을 헤맸다. 나는 미술은 잘 모르지만 전시를 그래도 몇 개 다니면서 내 나름의 관람 포인트를 생각해냈다. 일단 수많은 난해한 작품들 중에 멋진 것 몇 개를 고른다. 예컨대 30점이 있다면 보통 그 중 7-8개는 된다. 그리고 그 7-8개를 유심히 살펴보다 해설까지 곁들이면 아하, 그렇구나!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럼 내가 예술을 좀 볼 줄 아는구나 하는 다분히 자의적인 만족감과 함께 흥미도 느낄 수 있다.


오늘의 경우엔 칼더였다. 피카소도 초기작은 르누아르 같은 인상주의 화가와 화법이 다르지 않았다. 큐비즘에 경도되면서 많이 바뀌었지만 관찰 대상이 바뀐 건 아니었다. 비슷한 견지에서 칼더의 작품을 보면/보았더니 이해가 쉽다/좀 된다. 관찰 대상의 형체나 덩어리 그 자체를 캔버스에 옮기는 걸 넘어서 대상에 자유를 부여하는 일, 그게 칼더의 목적이었다고 하니 여기서 시작해보자. 툭 치면 끊어질 고리들로 간신히 이어놓은 쇳조각들이 사실은 길가에 핀 백합이나 방 한켠의 의자 같이 일상적인 사물을 그 형체에서 해방시킨 결과물이란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처음엔 별 생각이 들지 않다가 눈을 가늘게 뜰고 모빌과 해설을 번갈아 보니 이 사람이 뭘 만드려고 했는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철사 끝에 달려 작은 고리에 의지해 달랑거리는 쇳덩이는 칼더 말대로 형체에서 비로소 해방되고 나서야 달랑거릴 수 있었던 거다. 한 때 척번째 논문 쓰면서 자기혐오의 끝을 달릴 때 외부자극에 둔해지자, 스펀지처럼 공기를 많이 머금은 상태가 되자, 라며 혼자 취해선 글을 끄적이기도 했었는데 그 생각도 났다. 고리의 둥근 활을 따라 달랑거리기만 하면 되는 그 상태. 굳이 바닥에 붙어있지 않아도 되는 그 상태. 좀 괜찮아보이는데?



원래 얘기

이게 우연인지 몰라도 ‘9와 숫자들’이 말하는 ‘높은 마음’과 그 마음이 조금 부족해서 내가 말을 아끼는 순간들과 바닥에서 붕 뜬 칼더의 조각이 다 같은 얘기를 하는 것만 같다. 높은 마음이야 있으면 좋겠지만 언제나 가질 순 없고 가끔이야 그게 없어서 말을 하기 싫어지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보다 더 달랑거리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래도 백합은 백합이고 의자는 의자니까. 김광석은 맑고 향기로움은 멀리 있지 않다고 했다고! 맑고 향기롭게 달랑거리면서 너무 높진 않지만 약간은 높게 살면 좋겠다.


ps. 사진은 칼더 작품. 제목 뭔지 모르니까 untitled/ sans titre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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