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일기 #3
가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생활이 시작됐다. 그리고 난 정신없이 자다가 10시 수업을 놓쳤다. 그대로 침대에 1시까지 있다가 겨우 학교에 가서 오후 수업을 듣는데 뭔가 상쾌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익숙한 거리와 아는 건물을 드나들고 전에 가보았 던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집에 오는 길이 좋았다. 파리에서의 삶에 익숙해지는구나 생각했다.
어제는 친구와 밥을 먹으며 오는 길에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정확히는 논문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런 대화들을 나누는 게 즐거웠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대화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선거에서 투표를 할 때 명확한 정치적 선호도를 기반으로 결정하기보다는 선거에 출마한 어떤 후보 또는 그가 표방하는 가치들이 싫어서 온전히 그것을 피하기 위해 선택하는 경향이 더 높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그 차선을 연구하는 것이 본질을 더 꿰뚫는 방법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다 문득 은희경 소설이 떠올랐다. 은희경은 내가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던 작가다. 2015년 여름 밤에 <새의 선물>이라는 책을 단숨에 읽었고,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아래 덧붙인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감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크게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이 말들은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 많은 일들에 대한 해답이 되어주었다. 사람이 투표든 뭐든 하여간 어떤 선택을 할 때에 정확한 선호에 따라 결정을 하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좋은 것보다는 싫은 것을 정하는 게 더 쉽다는 것. 그렇게 모인 미운 것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내 취향의 지형도가 그려진다는 점. 참, 버릴 것이 하나 없구나 생각했다.
가을방학을 바쁘게 보내느라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는데 이 정도면 괜찮게 보낸 듯 싶다. 내내 뭔가 답답하더니 내 안에 말이 쌓여가는 게 싫었던 거였다. 부지런하게 생각하고 말하지 않아서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지런히 읽지 않아서 그랬다. 다시 책을 집어들고 정리를 해야겠다. 내가 정리는 젬병이지만 말은 쌓여선 안된다는 걸 안다. 쌓이기 전에 녹여내고 털어내고 정리해야지. 김영하 작가가 <알쓸신잡>에서 '언어수집가'로 소개되는 것이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언어라는 게 좀 필요할 듯 싶다. 말 말고 언어. 쌓여가는 말들을 정리해서 언어체계를 만들고, 조금 더 세련되게 사유하고 너그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바쁜 가을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