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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래원 Jan 17. 2024

엄마의 성장통



두려움 없는 소녀상

                                                        

 밤 11시가 넘어가는데 딸은 오늘도 이 시간까지 들어올 생각을 않는다. 전화를 해볼까, 아니 문자를 해 봐야 하나. 지하 주점 술자리에 있으면 톡은 안  될 거야,  동아리 모임을 아직도 할 리는 없는데, 선배들도 있는데 엄마가 자꾸 전화하면 창피하려나,  버스 끊기면 택시라도 타라 해야 하나....... 어휴, 계집애, 일찍 좀 다니지. 나는 집안일을 마치고도 눕지 못하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딸은 올해 대학에 들어갔다. 입학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재수도 않고 척 들어가 줘서 합격 발표 후에 우리 가족은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대학에 들어간 건 딸인데도 엄마의 노고를 위로하고 실력(?)을 치하해 주었다. 사람들의 축하를 받을 때마다 나는 내 인생의 한고비를 넘어낸 것 같은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수험생 딸의 뒷바라지는 남들이 얘기하는 것만큼 힘든 것은 아니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나도 입시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늘 마음 한편에 두고, 학원 알아보고 열심히 밥 해 주는 뒷바라지를 했더랬다.  그래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성실하게 공부한 딸의 노력이 없었다면 좋은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때로는 속으로는 그래, 저한테 집중해서 내 스케줄 맞추고 살면서 건강관리해 주고 학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했는데 자기가 나 아니면 쉬웠겠어, 하고 속으로는 공치사하고 으쓱해한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갓 대학에 들어간 딸의 일상은 불과 몇 달 전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라졌다.  고등학교 때는 아무리 늦어도 고작 학교나 학원 때문이었고, 만나는 친구들도 거의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새터(새내기 배움터의 줄임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과 정(기)모(임), 신입 학회원 모임, 선배와의 밥 약(밥 같이 먹는 약속), 미팅 등등 수많은 모임들로 가족들과 저녁 한 끼 먹는 날이 거의 없다. 딸 때문에 나의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요즘 들어 내게 새로 생긴 저녁 일과는 딸 귀가 기다리기, 버스 막차 시간 확인하기 같은 것이 추가되었을 정도이다. 딸아이가 없는 저녁 시간이 쓸쓸하다고 느껴져서 스스로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자녀를 대학에 들여보내고 엄마들이 겪는 상실감, 무기력함, 외로움을 뜻하는 ‘빈 둥지 증후군’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며 나는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장담하지 않았던가.  이 주 전쯤에 사소한 일이 발단이 되어 아이와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 서로 말도 안 하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답답한 건 나뿐이었다. 아이가 첫 미팅을 한다고 들었는데 궁금해도 묻지를 못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혹시 귀가가 늦으면 데이트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눈치만 살필 수밖에.  이런 상황에서는 가급적 아이와 부딪히면 나만 손해라는 비굴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도 밀착되어 지내던 딸아이와 멀어지고 있는 느낌이 들어 기운이 빠지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었다.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딸의 대학 입학을 기뻐하기만 하던 남편이 이 변화된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가 자정이 넘어 들어올 때면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게 어려웠다고 변명하곤 했으면서도 딸에게는 적당한 시간에(애 아빠가 원하는 시간은 늦어도 10시 정도이다) 가야 한다고 선배나 친구들에게 왜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냐며 야단을 친다. 거기다가 놀만큼 놀았으니 이제 좀 일찍 와서 공부도 해라라는 말까지 잊지 않는다. 자기가 술을 한잔하고 들어온 날도 아이가 탄 버스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서 정류장에 나가 딸을 데리고 들어온다. 이럴 때 딸의 입장은 한결같다. 모임에 안 나가면 친구나 선배를 사귈 수 없고 보통 11시가 2차 시작인데 나처럼 일찍 나오는 애도 없어요, 여자애들도 거의 다 2차에 가요, 하고 속상해한다. 사실 주변에 자녀를 대학에 보낸 부모들은 학기 초에는 아이들이 거의 새벽에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라는 말을 한다. 이런 말을 듣고 나는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딸을 너무 규제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다. 남편 역시 대학에 가면 자율적으로 하면 된다고 말하곤 했는데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속마음이 그게 아니었나 싶은 반응을 하는 것이다. 딸에게는 차마 대놓고 말도 못 하면서 나만 붙잡고 딸이잖아, 무슨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지, 그리고 모임에 너무 많이 다니면 자기 공부에 손해가 돼, 중심을 잡으라고 당신이 애한테 말 좀 해, 하고 번번이 싫은 소리를 한다. 아빠로서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왠지 딸에게 그대로 전하며 설득할 자신이 없다. 아니, 나의 본심은 그러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옛날 우리 젊은 시절 엄마들이 했던 것처럼 걱정하고 있다고 부모의 마음을 마냥 호소하고 화내기보다는, 성인이 된 이 시대 대학생의 엄마답게 뭔가 다르게 딸에게 말해야 할 것 같다.  아이는 이미 부모의 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의 세계는 갑자기 너무나 넓어졌고 그 세계가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부모가 걱정하는 마음을 만족시키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 같다. 여자라고 보호받기를 원하거나 알아서 데려다주는 남학생이 있기를 기대할 수 있는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 낯선 것들에 주눅 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새 환경에 잘 적응하는 딸이 다행스럽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술자리에서 여자니까 부모가 걱정해서 일찍 가야 한다고 ‘일어나는 당당함’보다는 비록 매우 늦은 시간까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지혜롭고 책임 있게 처신할 줄 아는 태도가 더 중요할 것 같다. 물론 대학은 학문을 하러 가는 곳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성인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시기와 맞물리는 때이기도 하다. 집에서는 용돈을 받아쓰는 자식이긴 하지만, 집 밖에서는 성인으로서 대접받고 행동해야 하는 시기이다. 생각지 못한 다양한 경험이 있을 것이고, 그 안에서 아이는 여러 가지 성취와 좌절, 사랑의 열정이나 실연까지도 겪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오히려 학업보다 자신에게는 더 심각하고 절절한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는 부모도 모르게 자랄 것이다. 내가 걱정하고 보호하려고만 하는 엄마이면 성인인 딸과 진정으로 소통하며 성숙한 영향력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내 딸이 여성으로서 세상이 만들어 놓은 크고 작은 장벽이나 편견에 갇히지 않도록 돕고 격려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 대학에서 전공을 택하여 학문을 탐구하며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딸아이는 앞으로 인생에서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이다. 진로를 정할 때도, 배우자를 택할 때도 진정한 행복의 길을 두고 진지하게 스스로 고민하도록 여유를 주고 기다려야 한다. 적어도 부모가 그 애의 앞길에 첫 번째 넘어야 할 장벽이 되지는 말도록 말이다.  보수적이고 편견도 많으며 다양한 자기 검열과 규제가 심한 나이기에, 개방된 의식으로 살아가려면 여간한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엄마가 깨어있는 사고를 하고 삶에 행복해하고 자유롭고 호기심이 넘친다면, 그것을 지켜보며 사는 딸의 삶에도 에너지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치열한 경쟁 상황에 처하더라도 여유를 갖고 자신을 바라보며 극복해 갈 수 있고, 전업주부로 살더라도  젊은이들이 흔히 생각하는 실패나 좌절의 길이 아닌 창조적 삶으로 가꾸어 갈 수 있는 풍성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내일부터라도 아이 앞에서 가사에 대한 짜증, 나의 인생에 대한 자조 섞인 푸념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아이에게 너만 바라보고 살았으니 나한테 잘해야 한다는 무언의 위세도 삼가고, 독립적으로 내 삶을 살아가며  자식의 자유의지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엄마로서 살아가기, 이것이 내 손을 떠날 만큼 성장한 딸과 진정으로 가까워지는 방법일 것이다. 


 한참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시계를 보니 1시가 다 되었다. 잠이 확 깨고 머리끝으로 열이 차오른다. 안 되겠다, 아니 얘가 보자 보자 하니 너무 하네 진짜, 하고 중얼거리면서 휴대폰을 집어 드는데 문자 알림 소리가 들린다. 엄마 이제 버스 탔어요, 걱정 마세요, 딸의 연락이다. 순식간에 온몸에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테이블 위의 티브이 리모컨이 눈에 들어온다. 소파에 느긋이 앉아 전원을 켜니 흥미로운 뉴스가 눈길을 끈다. 뉴욕에 등장한 ‘두려움 없는 소녀상(Fearless Girl)’이 소개되고 있다. 여성 리더십을 상징하는 이 예술품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인 월가 한복판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작은 체구에 짧은 원피스를 입은 가냘픈 모습이지만, 양손을 허리에 얹고 올백으로 머리를 넘긴 반듯한 앞이마를 치켜들고 전면을 당당히 응시하는 모습이 어쩌면 저렇게 우리 딸을 꼭 닮았는지.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오늘은 내가 사거리 정류장으로 슬슬 마중을 나가봐야 할까 보다.




                                                                                                            

 2017.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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