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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람 Feb 17. 2024

김씨며느리빙떡조합



“올해는 빙떡도 부치기로 했다”라는 큰 형님의 한마디에 며느리들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응? 빙떡이요? 그걸 저희가 직접 만든다고요? 이거 실화인가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다들 눈만 동그랗게 뜰뿐,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눈치껏 조용히 애호박 전을 부치며 큰 형님의 다음 지령을 기다렸다.


빙떡은 제주향토음식으로 제주도식 메밀전병이라 할 수 있는데, 고운 메밀가루 반죽을 돼지기름을 두른 번철이나 프라이팬 따위에 얇게 펴 놓고 가운데에 양념한 무채 소를 넣고 말아서 지진 떡이다.  

예로부터 화산섬인 제주는 토질이 투박하고 물이 고일 수 없어 논농사가 발달하지 못한대신 척박한 토양에서 잘 자라는 작물인 메밀을 많이 재배했다. 덕분에 메밀로 만든 향토음식들이 많았는데, 메밀칼국수, 메밀조베기(수제비), 메밀 범떡, 메밀묵, 메밀만두 등이 대표적이며, 그중 가장 유명한 게 빙떡이다.

고려시대 삼별초의 마지막 항전지였던 제주도를 침공한 몽골군이 삼별초의 전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독성이 있는 메밀을 퍼뜨렸는데, 똑똑한 제주인들이 차가운 메밀의 성질과 독성을 보완해 주는 무채 소와 함께 빙떡으로 만들어 먹어 메밀의 독성을 이겼다는 설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사실 직접 먹어보면, 맛은 거의 무맛에 가까울 정도로 심심한 맛이고, 만들기도 여간 복잡하고 귀찮아 현대인들은 잘 만들어 아니, 만드는 게 뭐야? 잘 찾아 먹지도 않는 빙떡을.

아주 가끔 결혼식 피로연에서 (아주 신경 쓰고 열정을 다했다는 평을 듣기 위해 내놓는) 고급음식으로 혹은 오일장이나 향토음식점에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희귀 음식이 되었다는 그 빙떡을 내가 만들게 되다니.

만들기는커녕, 제대로 맛본 적도 몇 번 없는 빙떡을 내가 만들게 되다니. 세상에^^ 놀랄 노!!!


그동안 우리 시댁은 며느리가 여덟이기도 하고, 명절음식을 아주 간단하게 하는 편이라 한두 시간 반이면 차례음식을 다 하고도 시간이 남았다.

지역마다 집안마다 차례 음식 종류도 양도 가지각색이라지만, 유독 양도 종류도 적은 편이라 여겨졌던 우리 시댁은 주변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았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빙떡을 지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만...?


샛어머니 지령에 따라 큰댁 우영팟(앞마당 텃밭)에서 뽑아온 무를 며느리 둘이 한참 동안 채로 썰었다.

며느리 A에게 무 썰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혹시 채칼을 쓰면 어떨까요?” 물었지만, “채칼로 썰면 안 된다게, 채칼로 썰믄 너무 잘아그네 맛도 어서! 칼로 잘 썰라이” (채칼로 썰면 안 돼. 채칼로 썰면 너무 잘게 잘려서 맛이 없어! 칼로 잘 썰으려므나)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아…. 내가 일찍 와서 애호박 전을 미리 선점하길 다행이다. 나는 칼질도 잘 못하는데 저기 갔으면 무보다 내 손이 먼저 썰릴 뻔했어. 휴…” 안도의 한숨을 쉬는 동안 차례음식이 거의 마무리됐다.


평소 같았으면 이제 슬슬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데 무채도 완성되지 못했으니, 언제쯤 집에 갈 수 있으려나?

점심때가 되었으니, 떡국 한 사발 들 하고 빙떡을 지지면 되겠다는 큰 형님 말에 며느리들의 눈은 또다시 초점을 잃었다.

떡국 안 먹어도 돼요… 집에 보내주세요… 또 루루..

그렇게 소화도 잘 되지 않을 것 같은 떡국을 초스피드로 입속으로 집어넣고, 설거지하는데, 빙떡 부치기 세팅 포인트 눈치싸움이 시작됐다.


메밀반죽을 저을 것인가, 빙떡을 프라이팬에 부칠 것인가, 빙떡을 말 것인가, 설거지 등 뒷마무리를 할 것인가.

어디를 선점해야 쿠사리(잔소리,훈계) 안 먹고 오늘의 미션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빨리 끝낼 수  있을까.

눈치껏 빠르게 스캔 후 나는 조용히 대나무채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빙떡마는 게 제일 쉬워 보였다. 여전히 살림 조무래기일 뿐이지만, 나도 이제 김밥 정도는 맨손으로 말 수 있는 9년 차 주부가 되었으니 빙떡쯤이야 말 수 있겠지? 했다.


각 동서들의 포인트 선점 후 어머님들의 시범이 이어졌다.

메밀반죽을 이렇게 잘 지어서, 그래, 이 정도 점성이면 되겠다. 이렇게 무를 잘라 참기름을 프라이팬에 바르고(원래 돼지기름으로 해야 베지근(담백, 느끼)하고 맛있는데, 오늘은 돼지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참기름으로 하자) 국자로 퍼서 프라이팬에 휘휘 얇고 또 얇게 잘 펴서 익히다 보면, 가장자리가 살짝 올라오는데, 그럼 다 익은 거! 그때 꺼내서 대나무채반에 올려 살짝 식힌 뒤 무채를 가운데 올려놓고 살살 말아서 네 손가락으로 양 옆을 살포시 눌러 붙이면 완성이 되는 거라!

응? 몇 번 설명을 듣고 몇 번을 봐도 내가 말기만 하면 메밀전병이 부서졌다.

해도 해도 도저히 모양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빙떡.

빙떡의 ‘빙’이 떡을 뜻하는 한자’ 병’이 빙으로 되어서 빙떡이라 했다던가, 빙빙 돌리면서 부치거나 돌돌 말아서 먹어서 빙떡이라 했다던가 하는데, 만드는 사람 빙빙 돌게 해서 빙떡이라 부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빙떡 만들기 난이도는 상중하 중 극극극 최상이었다.


그래도 역시 뭐든 해보면 는다고, 메밀반죽이 바닥을 보일즈음 며느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의 능력치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에 부친 빙떡을 차례상에 올릴 용으로 남겨두고, 빙떡은 모름지기 따뜻할 때 먹어야 한다며, 큰 형님이 여덟 며느리들에게 모두 열개씩 싸주고도 남을 만큼이었으니. 대체 우린 몇 개의 빙떡을 부쳤는가^^

시장 가면 3개에 5000원에 판다는데, 우리 이거 ‘김씨며느리빙떡조합’이라도 만들어서 오일장날마다 가서 팔아보는 거 어떻겠냐며, 우리 진짜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것 같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며 빙떡 만들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결혼 9년 차. 매년 며느리경험치가 자연스럽게 업그레이드되었다며, 이제 차례음식 정도는 쿠사리(잔소리)안먹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으려는 찰나였는데, 빙떡으로 다시 며느리경험치 조무래기가 되어 돌아왔다. 하하하.

다음 명절이 기대가 된다. 나는 언제쯤 며느리 만랩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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