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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lan Nov 25. 2016

나의 앨리스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고

http://www.koreaittimes.com/story/66273/%EC%97%B0%EC%9E%AC%EC%B9%BC%EB%9F%BC-%EB%82%98%EC%9D%98-%EC%95%A8%EB%A6%AC%EC%8A%A4-%EC%9D%B4%EC%95%BC%EA%B8%B0-1


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동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시절부터다. 편집디자인 수업 시간에 친구가 이 동화를 가지고 책을 만들었는데 꽤 근사했다. 원작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시각적 상징물, 이를테면 걸어다니는 토끼, 트럼프 병사, 홍학 크로케 그리고 체셔 고양이 등의 신비롭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어느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관련된 기사[4]를 읽게 되었다. 기사는 원작이 가진 의미들을 풀어서 설명하고 있었는데 이 동화에 대해 이렇게 깊이 분석한 글을 접한 것은 부끄럽지만 이 글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나에겐 큰 충격이었는데 왜냐면 그 이전까지는 이 동화를 단순히 아이들을 위해 쓰여진, 삽화가 예쁜 동화라고만 생각했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될만한 소설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기사로 나는 원작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고 원작 관련 다양한 주석서와 글들을 찾아보게 되면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어린소녀의 외모 이면에 성숙하고 매력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여인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읽은 앨리스 관련 주석서는 <앨리스의 이상한 인문학> 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형태적으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일종의 주석서이다. 이 책이 다른 주석서와 차별점이 있다면 다른 주석서들은 일대일로 원작의 내용을 자세히 그리고 정확히 풀이하는데 집중하고 있다면, 이 책은 정신분석학, 정치학, 철학 등의 저자가 선별한 인문학적 코드 12가지를 원작의 이야기를 통해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주석서 형식의 인문학 도서라는 점이다.

가장 최근에 읽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주석서 <앨리스의 이상한 인문학>(좌), 앨리스 시리즈는 다채롭고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가득하다(우).


1. 패러독스, 모순이 주는 매력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이를 둘러싼 세계는 패러독스로 가득차 있다. 우선 이 소설의 작가인 루이스 캐럴은 딱딱하고 지루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지만 동시에 논리학과 수사학에 재능을 보이고 그림과 사진을 좋아해서 동화도 집필하고 퍼즐게임도 고안하는 소설가이자 사진작가라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소설의 형태 자체는 매우 단순한, 전형적인 회귀식 모험 소설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넌센스, 언어유희 그리고 풍자로 가득차 있어서 내용을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다는 점. 마지막으로 어린 소녀인 앨리스를 위해 쓴 동화이지만 동시에 본인의 지적인 즐거움과 유희의 만족을 위해 이 책을 집필했기 때문에 어른들에게 큰 영감을 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양립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들이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며 존재하는 모습을 통해 반전의 쾌감을 경험하게 해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인 루이스 캐럴(좌)과 원작의 실제 모델인 앨리스 리델(우)


2. 주변 문화로의 영향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무한한 해석과 인용의 가능성이 열려 있어서 영미문화권에서는 '성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인용되는 고전작품이라고 하며, 후대의 문학, 음악, 미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들이 이 '앨리스'를 모티브로 한 다양한 미술작품을 선보였고, 노벨상 수상자인 프란시스 크릭 Francis Crick은 자신의 책 <놀라운 가설 The Astonishing Hypothesis> 에서 체셔고양이 실험을 통해 뇌의 오묘함을 보여주는 양안시차를 설명한다. 또 신경학에서는 앨리스가 겪은 착시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로 '앨리스증후군 Alice in Wonderland Syndrom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7]. 앨리스가 길게 늘어나거나 작아지는 등의 표현은 'Micropsia : 물체가 작게 보임', 'Macropsia : 물체가 크게 보임', 'Metamorphosia : 물체가 왜곡되어 보임', 'Teleopsia : 물체가 멀게 보임' 등의 편두통 증상과 관련이 있으며 1955년 영국의 외과의사 토드J.Todd가 자신의 논문에서 편두통과 간질환자 등에서 보이는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3]. 또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Jacques Lacan은 거울단계 Mirror Stage 이론에서 인간이 유아기 때 거울을 통해 거울 밖 자아와 거울 속에서 대면하게 되는 또 다른 자아를 인식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통해 본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내용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편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서 겪는 모험을 연상시킨다[2].

체셔고양이가 눈과 입을 남기면서 사라지는 장면(좌), 앨리스가 몸이 커지는 장면(가운데),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거울로 들어가는 장면(우)
현대 미술 작가인 야오이 쿠사마가 작업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처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3. 토끼굴 속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지면서 시작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빨간색 약과 파란색 약 중 하나를 선택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파란색 약을 선택하면 매트릭스의 세계 속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네오는 '진짜 현실'에 대한 호기심으로 빨간색 약을 선택한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오마주 영화이며 '흰 토끼를 따라가라'는 암호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패러디한 것이다[7]. 앨리스가 토끼굴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이상한 나라는 현대 시대를 관통하는 훌륭한 철학적 단초가 된다. 이 토끼굴 속 새로운 세계는 앨리스가 살고 있는 기존 세계와의 대립을 가져오며 이 두 세계관의 개념은 이후 현대 철학 사조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오마주하는 영화다.

3.1. 플라톤 시뮬라르크

현대 철학 사조의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플라톤의 시뮬라르크 Simulacre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플라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참세계'가 아니라, 진리의 원형인 이데아가 가득찬 참 세계를 복제한 세계로 보았다. 그리고 이데아의 복제물을 다시 또 복제한 것을 '시뮬라르크'라고 정의하였다. 복제물 Eikones들은 이데아를 흉내내고 있어 유사성을 담고 있지만 복제물을 복제한 시뮬라크르 Phantasmata는 위계 가치 상 가장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6].

그림자 놀이 , 철판 프로젝터 선풍기, 1986, Christian Boltanski and Galerie Marian Goodman, Paris/New York

위의 그림 속 불탕스키의 작품이 연출하는 상황처럼, 플라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저 천상에 있는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굴의 비유에 따르면, 인간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동굴에 갇혀 이데아를 모사한 인공물을 동굴 벽에 비추며 그림자를 현실, 참된 실재로 착각하며 살아간다고 주장했다[1].


3.2. 질 들뢰즈의 시뮬라르크

플라톤이 시뮬라르크를 무시한 것에 반해,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시뮬라르크가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주목했다. 플라톤은 본질과 외관, 이데아와 그림자, 원본과 복사본, 모델과 시뮬라크르를 구분하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플라톤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시뮬라크르를 옹호한다. 플라톤과 들뢰즈의 가장 큰 차이는 이데아에 대한 입장에서 비롯되는데 플라톤은 이데아를 가장 참된 것으로 간주하고 현실은 이데아의 복제이며, 시뮬라크르는 복제의 복제로 가장 가치 없는 것으로 보지만 들뢰즈는 애초에 이데아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원본과 시뮬라크르 간의 대조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다. 시뮬라크르는 시뮬라크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시뮬라크르는 어떤 절대적 기준에 의해 그 가치가 평가될 수 없다고 말한다[6].

영화 <인셉션>의 토템(위)과 게임 <모뉴먼트 벨리> 속 토템(아래)

들뢰즈는 현대에 들어오면서 시뮬라르크가 원형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을 뛰어넘어 새롭게 의미를 창출한다고 보았다[7]. 토템 Totem이라 불리는 상징물은 원래 원시사회에서 숭배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오면서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이 토템이라는 개념을 이용하면서 작가의 의도가 덧입혀져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은 이 시뮬라르크의 개념을 잘 보여준다. 주인공 돔 코브가 설계하고 창조한 꿈 속 새로운 가상 세계는 시뮬라르크이지만 돔 코브는 결국 이 가상세계를 더 사랑하게 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 속에서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시켜주는 도구로서 팽이 형태의 토템이 등장한다. 멈추지 않고 회전하는 팽이는 가상세계임을 보여주며 영화 마지막 순간에 등장하는 토템은 관객들에게 지금의 현실이 꿈일 수도 있다는 메세지를 전달하며 이 토템이 관객의 토템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게임 '모뉴먼트 밸리'에서도 토템이 등장하는데 이 토템은 주인공인 아이다가 시공간이 모호한 모뉴먼트 밸리를 여행하면서 위기의 순간 순간 아이다에게 길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같은 토템이라는 실재의 원형 재료를 활용했지만 창작자가 창작물에 맞게 부여한 의미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개념이 된 것이다.


3.3.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는 질 들뢰즈의 시뮬라르크에서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 의미의 시뮬라시용 Simulation이라는 개념을 정의하였다.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는 원본 없는 이미지 그 자체가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미지에 지배받아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을 나타내는 '과다실제Hyper-reality'에 놓여있다고 보았다[7]. 보드리야르는 들뢰즈가 정립한 시뮬라르크에 바탕을 두고 동사적 의미인 '시뮬라르크를 하기'라는 뜻으로 '시뮬라시옹'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면서 현대 사회에서 실체보다 기호가 더 본질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강조했다[7].

딸기맛 우유 속에는 딸기 대신 딸기색 색소가 들어있다. 스타벅스의 초록색 사이렌 로고는 어떤 취향을 상징한다.

딸기맛 우유에는 딸기가 없고 대신 딸기 색을 낼 수 있는 연지벌레 추출물과 딸기 향만 있을 뿐이지만 사람들은 딸기 맛 우유를 마시며 딸기를 떠올린다. 바나나맛 우유도 마찬가지로 바나나는 하얗지만 껍질이 가진 색상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노란색을 띈다[7]. 또 스타벅스는 커피의 입맛Taste을 하나의 미학적 취향Taste으로 바꾸어놓았는데 스타벅스의 등장으로 커피 잔에 프린트된 초록색 사이렌 로고는 그것을 소유한 이가 어떤 '취향 공동체'의 일원임을 의미하게 된다. 상품을 통해 특정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것을 장 보드리야르는 ‘파노플리 효과’라고 명명했다[8].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는 허구 자체가 세계가 되고 허구로서의 커피, 서사로서의 커피가 오늘날에는 이미 에스프레소의 진한 액체만큼 진한 물질적 현실을 보여준다. 기표 Signifiant와 기의Signifié 의 의미는 사라지고 기호의 자의성이 강화되어 대중은 상품과 상품 사이의 '차이'를 소비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기호가치가 되어버렸다[8]. 사람들은 이제 미키마우스를 통해 쥐를 생각하게 되고 마블사가 만들어낸 히어로들과 그 세계관을 선봉하며 살아간다. 현대는 바야흐로 기존에 인류가 으레 갖고 있었던 의미생성의 논리가 전복된 시대이다.  


4. 유머의 철학, 말도 안되게 재미있는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외계어를 만들어서 그 외계어 단어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그 외계어를 기록하고 그 단어로 친구들과 대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언어에 기 반영된 의미와 언어 간의 규칙들을 익히는 과정을 통해 어른 세계에서 통용되는 세상의 규칙들을 체화시켜 나간다. 그런데 어쩌면 이 사회화라는 과정이 아이 때의 그야말로 말이 안되는 놀이가 가진 상상력과 새로운 형태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점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오든 W. H. Auden은 "이상한 나라와 거울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캐릭터 중 하나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라고 말할 정도로 루이스 캐럴은 19세기 영국에서 유행하던 유머나 시에 패러디 기법을 적용하여 언어적 유희와 문학적 환상을 표현했다[2]. 또 언어 그 자체에 애너그램, 어크로스틱, 문답 등 다양한 언어적 기법을 활용하여 언어 자체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기존의 현실세계에서 규정되어 있던 언어 법칙과 의미들을 부수고 해체하여 언어의 넌센스를 통해 언어의 새로운 의미를 탐색하도록 한다[2]. 앨리스는 두 나라의 모험을 통해서 "수동적인 대상"이라 여겼던 단어들이 "그들 자신의 생명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2]. 앨리스의 이야기에서는 현실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들이 넌센스 세계에서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거나 혹은 해체되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2]. 앨리스가 넌센스 세계의 언어게임 속에서 언어의 전복을 경험하면서 독자들 또한 언어의 새로운 의미를 인식하는 과정을 탐구해 볼 수 있다[2].


4.1. 애너그램 Anagram

캐럴이 즐겨 사용한 언어 기법으로는 애너그램 Anagram이 있다. 이것은 단어나 문장을 구성하는 글자를 재배열하여 새로운 단어나 문장을 만드는 것으로 어구전철이라고 한다. 우선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 부터가 본명의 철자를 바꾸어 만든 애너그램이다[4]. 작가의 본명인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 Charles Lutwidge Dodgson의 'Charles Lutwidge'를 'Carolus Ludovicus 카롤루스 루도비쿠스'라는 라틴어로 번역하고 이를 다시 역순으로 배열한 뒤 영어로 번역한 필명이 바로 'Lewis Carroll'이다[3]. 따라서 그의 본명과 필명은 서로 순서만 바뀌었을 뿐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3]. 루이스 캐럴의 창의력을 물려받아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 등의 걸출한 판타지 작품을 배출해낸 영국의 판타지 문학 속에도 애너그램을 찾아 볼 수 있다.

 

"톰 마볼로 리들TOM MARVOLO RIDDLE

그리곤 그가 그 지팡이를 한 번 더 휘두르자, 그 문자들이 저절로 재배열되었다.

난 볼드모트 경이야 I AM LORD VOLDEMORT"


그리고 영화 <다빈치코드>에서는 이런 암호풀이도 나온다.

"O, DRACONIAN DEVIL! 오, 드라코 같은 악마여!

OH, LAME SAINT!  오, 덜 떨어진 성인이여! = THE MONA RISA!" 모나리자!


4.2. 펀 Pun

또 캐럴은 펀 Pun이라고 부르는 말장난을 이용하여 기존의 관습적인 것들과 질서를 무기력화 시킨다. 펀은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지만 뜻이 전혀 다른 단어나 어구를 문장에 일부를 섞음으로써 수사학적 효과를 도모하는 언어유희 방법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3장에서 장미정원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지 못해 눈물을 흘리던 앨리스는 자신이 만든 눈물웅덩이 Pool of Tears에 빠지게 되고 여기에서도 지상 세계의 언어질서와는 다른, 지하세계의 뒤죽박죽인 언어를 접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눈물웅덩이에 빠진 동물들을 말려준다고(dry) 생쥐가 동물들을 모아놓고 세상에서 가장 무미건조한(dry)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을 보면 "dry"란 단어를 실제 사용법과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다분히 전복적이다[2]. 즉, 지상 세계의 언어적 질서가 해체되는 과정을 펀을 이용하여 보여주고 있다. 또 앨리스가 지나가던 생쥐를 만나서 나누는 대화에서 생쥐가 “길고 슬픈 이야기”(long and sad tale)를 하겠다는 말에 앨리스는 긴 꼬리(long tail)가 왜 슬프냐고 묻는다.

결국 앨리스는 생쥐의 이야기를 꼬리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생쥐의 이야기가 다섯 번 휘어졌다고 횡설수설한다. 이에 생쥐는 황당해 하며 아니라고 "not" 대답하고 또 앨리스는 그것을 매듭 "knot"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대화에서 등장하는 단어가 동음이의어여서 각기 그 뜻을 다르게 이해한 생쥐와 앨리스는 계속 서로 동문서답으로 대화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언어의 전복을 유희를 통해 보여주는 3장에는 5번 매듭진 이야기가 나온다.


4.3. 더블릿 Doublet 

캐럴은 기존의 언어 유희법을 적극 활용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서 직접 언어를 이용한 게임도 창작하기도 했다. 더블릿이라는 게임은 캐럴이 발명한 말놀이로 낱말의 철자를 하나씩 바꾸어서 목표한 낱말에 도달하는 게임이다[2]. 세부 규칙으로는 처음과 마지막에 생긴 두 단어는 같은 길이의 단어여야 하고, 어떤 명백한 방법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어야 하며, 같은 위치에 같은 글자가 있어서도 안된다[2]. 가령 "생쥐의 머리(head)를 꼬리(tail)로 바꿔보라"는 더블릿 문제를 풀게되면 HEAD→heal→teal→tell→ tall→TAIL! 이 된다[4]. 다음으로 캐럴 연구자 마틴 가드너가 발제한 더블릿 문제는 "원숭이(ape)를 한번 인간(man)으로 바꿔보라" 는 것이다. 수십만 년에 걸친 진화의 과정은. APE→apt→opt→oat→mat→MAN! 으로 요약할 수 있다[4].


4.4. 아크로스틱 Acrostic

마지막으로 아크로스틱이라는 방법도 등장하는데, 이것은 각 행의 첫 글자를 아래로 연결하면 특정한 어구가 되게 쓴 시나 글로 우리나라의 삼행시와 유사하다. <거울나라의 앨리스>의 맨 뒷 장에 보면 앨리스를 위해 쓴 헌시가 있다. 21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각 행의 앞 자들을 따면 'Alice Pleasance Liddell'이라는 소설의 실제 모델인 앨리스 이름이 된다.

앨리스를 위한 헌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처럼 말장난, 전승 동요나 시의 패러디, 더블릿, 어크로스틱 등 언어로 이루어진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 이런 언어게임은 언어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면서 그 언어를 현실로부터 격리시키고, 상투적인 언어 사용에서 벗어난 단어 그대로의 의미해석은 현실 세계의 진부한 언어논리에 익숙한 앨리스와 독자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다[2]. 이렇게 캐럴은 현실세계의 의미를 무의미의 세계로 만들어 현실의 진부하고 고루한 관습들을 유머를 통해 우아한 한 방을 날린다.


5. 현실세계의 비판

5.1. 배경이 가진 의미

앨리스 시리즈가 쓰여진 19세기 빅토리아시대는 영국이 대영제국으로서의 위상이 절정에 이른 시기로서 산업혁명으로 인해 도덕주의와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산업혁명의 긍정적인 측면에 반하여 부정적인 측면도 대두되었는데 캐럴은 '앨리스' 시리즈의 의인화된 캐릭터와 황당한 사건들을 통해 산업혁명과 부조리한 세계에 대해 비판하고 급속한 산업화 속에서 당시의 사람들이 느꼈던 당혹감와 혼란스러움을 표현한다. '이상한 나라'는 혼란스러운 지하세계처럼 신이 부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도널드 래킨 Donald Rackin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원제가 '지하세계의 앨리스'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지하세계에서는 지상세계에서 받아들여지는 관습과 의미와 질서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넌센스의 세계로 표현되며 이상한 나라는 나름대로의 논리로써 "지상 세계가 갖는 저속한 논리를 파괴한다"고 설명한다[2]. 넌센스 세계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일관성 없는 논리에 따라 반응하기 때문인데, 그들의 무례하고도 급작스러운 태도는 통속적인 현실 세계의 부조리성과 비논리성을 통렬하게 풍자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지하세계를 이용했다면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거울이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거울 뒤에 있는 '거꾸로 된', '뒤바뀐' 세계를 통하여 당시의 사회를 비판한다.


5.2. 붉은 여왕 가설

실제 사회의 모습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맹렬한 비난은 비단 배경의 선택에서 그치지 않는다.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은 앨리스와 함께 나무 아래에서 계속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계속 뛰어도 제자리인 것이 이상하다"고 묻는 앨리스에게 붉은 여왕은 "제자리에 있고 싶으면 계속 뛰어야 된다"고 답한다.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는 어떤 물체가 움직이면 그 주변 세계도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전진을 하려면 움직이는 세계보다 두 배 세 배 더 빨라야 겨우 한 발 더 내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혹자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산업사회에서 성공의 야망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질주하는 자본주의자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고도 하고, 진화 학자는 생태계의 쫓고 쫓기는 평형 관계를 묘사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또 물리학자들은 이 장면을 아무리 빨리 달려도 빛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현상에 대한 비유로 사용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 에 등장하는 앨리스와 붉은 여왕의 달리기


여러 비유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 시카고대학의 진화생물학자 리 밴 베일런 Leigh van Valen이 1973년 제시한 '붉은 여왕 가설'이다. 해양 화석을 연구하던 그는 종의 멸종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하게 된다. 어떤 종이 환경에 적응했더라도 결코 방심할 수가 없는데, 다른 종들도 그 환경에 곧 적응하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는 진화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결국 뒤쳐져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붉은여왕 가설'을 소개한 '새로운 진화 법칙'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고 그 진화학적 원리를 '붉은 여왕 효과 Red Queen Effect'라고 명명했다[5].  1993년 과학저술가 매트 리들리 Matt Ridley는 <붉은 여왕: 성과 인간 본성의 진화, Red Queen: Sex an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이 널리 알려지면서 '붉은 여왕'은 더욱 유명해졌다. 붉은 여왕 가설은 진화학에서 거론되는 원리이지만 이 원리는 진화론 뿐만 아니라 경영학의 적자생존 경쟁론을 설명할 때도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5].


이제는 소설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도도새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명체 가운데 적게는 90%, 많게는 99%가 소멸했다고 한다[5]. 즉, 거울나라의 이치와 같이 적자생존의 자연환경 하에서 다른 생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화가 더딘 생명체가 결국 멸종한다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여 특유의 근엄한 모습으로 웃음 짓게 만들었던 도도 Dodo새는 서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동쪽 모리셔스 섬에 서식했는데, 지금은 멸종하여 아쉽게도 소설 속에만 만날 수 있는 새가 되었다. 이 새는 모리셔스 섬에 자생하는 칼바리아 Calvaria 나무의 열매를 먹고 자랐는데 천적이 없는 평화로운 환경과 풍부한 먹이 덕분에 날아다닐 필요가 없어 날개가 퇴화해 버렸고 빨리 뛰어 다닐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다리도 짧아졌다[5]. 그러나 15세기 초부터 시작된 대항해시대의 전개와 더불어 지리상의 발견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모리셔스 섬도 16세기 초 포루투갈 인들에게 발견되었고 오랜 항해에 지친 선원들은 천적이 없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던 도도새를 마구잡이로 포식하기 시작하여 (도도새의 "도도Dodo"는 포루투갈어로 '어리석다'를 의미한다) 도도새는 결국 멸종하게 된다. 앨리스가 토끼굴에 뛰어들어 이상한 나라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세상이 가진 여러 의식적인 문제, 또 뒤틀린 세상의 이면의 모습, 그리고 삶에 대한 진지한 의문과 성찰의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도 우리의 삶에 안주하거나 타협하고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앨리스가 회중시계를 들고 뛰어가는 토끼를 만난 것은 어떻게 보면 앨리스의 인생에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 늦지 않은 지금 나도 다시 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진짜 비밀을 들쳐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여주인공 요나가 크로놀 Kronol을 이용해 기차문을 부수고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에 한 발 내딛었던 것처럼 우리 인생의 기폭제가 될 크로놀 같은 이 토끼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기대해 본다. 토끼를 발견하는 것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 진중권.『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휴머니스트, 2005.

[2] 이수진. "루이스 캐럴의 언어게임—앨리스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국근대영미소설학회』, 2005, 12(1), p. 97-118[

[3] 이지현. "루이스 캐럴의 그림책 ‘앨리스’ 시리즈의 상상력을 중심으로 살펴본 화문대구성 연구". 『한국디자인포럼』, 2008, 20, p. 307-316

[4] 진중권. "‘부조리의 세계’로 현실 뒤집다". 『주간동아』, 2005. 406호, p. 104-106 

[5] 류우야. "붉은 여왕 가설". 2016. <http://getitall.tistory.com/entry/%EB%B6%89%EC%9D%80-%EC%97%AC%EC%99%95-%EA%B0%80%EC%84%A4-Red-Queens-Hypothesis-%EC%9D%B4%EB%9E%80>

[6] 이우. "시뮬라크르(Simulacre)와 시뮬라시옹(simulation)". 2013. < http://www.epicurus.kr/?mid=Humanitas&page=8&document_srl=339025>

[7] 이남석. 『앨리스의 이상한 인문학』. 옥당, 2015.

[8] 진중권·정재승.『크로스』. 웅진지식하우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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