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가 움직이는 곳이 달라졌다

패션 브랜드가 다시 지도를 그려야 하는 이유

by LBR

패션업계에서 '어디에 열 것인가'는 늘 중요한 질문이었다. 명동이냐 홍대냐, 백화점이냐 복합몰이냐. 그런데 최근 이틀치 뉴스를 보면서 그 질문의 전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비자가 움직이는 곳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 빠르게.


성수동에 외국인이 24배 늘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동아일보가 서울시 생활인구 데이터를 2017년부터 2025년까지 추적 분석한 기사가 나왔다. 숫자가 꽤 충격적이었다. 성수동 외국인 방문객이 시간당 93명에서 2,257명으로 24배 급증했다. 반면 명동은 같은 기간 시간당 1만6,034명에서 9,843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명동이 죽은 게 아니다. 여전히 서울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명동이다. 다만 성장하는 곳이 달라졌다. 홍대·신촌은 3,854명에서 4,794명으로 늘었고, 잠실은 2,382명에서 3,901명으로 64% 증가했다. 한강공원도 30% 넘게 늘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연구자들은 K콘텐츠를 원인으로 꼽는다. 넷플릭스 드라마, 유튜브 브이로그를 통해 '서울 시민의 일상'이 전 세계에 콘텐츠로 유통되면서, 외국인 관광객이 전통 관광지보다 그 일상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려는 수요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관광의 목적이 '명소 방문'에서 '일상 체험'으로 이동한 것이다.


패션 브랜드 입장에서 이 숫자가 의미하는 건 분명하다. 팝업 스토어 하나를 어디에 여느냐, 플래그십 매장 입지를 어디로 잡느냐의 문제가 달라진다. 외국인 소비 동선이 성수·한강·홍대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지금, 이 변화를 아직 반영하지 못한 브랜드라면 지도를 다시 펼쳐볼 필요가 있다.


외국인이 백화점도 바꾸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백화점 수치도 눈길을 끌었다. 미국-이란 전쟁 장기화로 내수 소비심리가 위축된 상황인데도, 롯데·신세계·현대 백화점 3사의 1분기 실적 추정치는 오히려 상향 조정되거나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유는 외국인 수요다.


지난달 롯데백화점 본점 외국인 매출은 전년 대비 110% 급증했고, 신세계백화점 본점은 220%, 더현대 서울은 108% 증가했다. BTS 관련 대형 이벤트로 방한 수요가 집중된 효과도 있지만, 증권가에서는 중국인 단체 관광이 본격화될수록 이 흐름이 더 강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K콘텐츠가 만들어낸 방한 수요가 실제 구매력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데이터다. 내수가 흔들리는 국면에서 외국인 소비가 실질적인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는 구조다. 패션 브랜드 입장에서는 내국인 고객만을 기준으로 설계된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다시 점검해야 할 시점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소비 맥락이 바뀌면 아이템도 바뀐다


동선만 바뀐 게 아니다. 소비의 기준 자체도 달라지고 있다.


봄이 되면서 유통업계 전반에서 피크닉·나들이 수요 선점 경쟁이 시작됐다. 4월 평균 교통량이 3월 대비 4.2% 높다는 한국도로공사 데이터가 있을 만큼, 계절적 이동 증가가 실구매로 이어지는 패턴은 매년 반복된다. 올해도 편의점부터 대형마트까지 피크닉 수요를 잡기 위한 상품 전략이 일제히 가동됐다.


키즈 패션에서는 더 흥미로운 숫자가 나왔다. W컨셉 기준 최근 한 달간 키즈 바람막이 검색량이 전월 대비 80% 증가했고, 베이비·키즈 아우터 카테고리 매출은 700% 급증했다. '바람막이 하나로 끝낸다'는 기사 제목이 과장이 아닌 셈이다.


이 흐름을 단순히 '봄 시즌 아이템 인기'로 읽으면 절반만 보는 것이다. 고물가가 장기화되면서 부모 세대의 소비 합리화가 자녀 패션 구매 기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사계절 내내, 다양한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아이템. 성인복에서 이미 확인된 '활용도 중심 소비' 흐름이 키즈로 확장된 것이다. 브랜드 입장에서는 단품의 기능성과 범용성을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하느냐가 구매 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환경이 됐다.


플랫폼도 소비자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소비자 동선이 바뀌면 플랫폼도 따라 움직인다. 현대백화점이 기존 온라인몰을 통합한 앱 '더현대하이'를 출범시키면서 커뮤니티 기능을 전면에 배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용자가 직접 콘텐츠를 생산하는 공간, 크리에이터가 큐레이션하는 공간, IP 기반 팬덤 소비를 겨냥한 공간을 결합해 단순 쇼핑몰이 아닌 취향 기반 커뮤니티 플랫폼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오늘의집'이 인테리어 커뮤니티로 시작해 커머스로 확장한 구조를 백화점 앱에서 구현하려는 실험이다. 콘텐츠 체류 시간이 구매 전환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인데, 패션 브랜드 입장에서는 이 플랫폼이 단순 입점 채널이 아니라 크리에이터·IP·커뮤니티와 결합한 콘텐츠 노출 채널로 기능할 가능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이버가 새로운 버티컬 패션몰 '노크잇'을 출범시킨 것도 같은 흐름이다. 검색·결제·멤버십 인프라를 패션 소비 접점에 직접 결합하면서 무신사와 정면 경쟁 구도에 진입했다. 플랫폼 경쟁의 무기가 콘텐츠와 큐레이션에서 데이터와 인프라로 확장되고 있다는 신호다.


지도를 다시 그린다는 것


소비자가 움직이는 곳이 달라졌다. 명동에서 성수로, 전통 관광지에서 일상 공간으로, 백화점 단독 동선에서 로컬 상권과의 병행 동선으로. 그리고 오프라인 매장에서 커뮤니티 앱으로.


이 변화들은 각각 독립된 현상이 아니다. 소비자가 '어디서 무엇을 경험하고 싶은가'라는 기준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하나의 신호다. K콘텐츠가 그 경험의 욕구를 만들었고, 플랫폼들은 그 욕구를 잡기 위해 구조를 바꾸고 있다.


패션 브랜드가 다시 지도를 그려야 한다는 건 거창한 말이 아니다. 내 고객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 무엇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지. 그 질문을 다시 꺼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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