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자궁내막증을 진단받고 런던 생활을 강제로 마무리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5년 전에도 이미 자궁내막증으로 한국에서 수술을 받았고 그 이후로도 계속,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호르몬 치료를 받았다. 루프린 주사와 비잔, 미레나 시술, 영국에서만 라이센스가 있는 라이코 복용까지 늘 호르몬 관리에 신경을 써왔지만 생리통처럼 싸한 통증이 잊을만하면 찾아왔고 온몸이 몸살에 걸린 것처럼 이유 없이 아프기도 했다. 생리를 하지 않는 기간이 늘어나면서 골밀도 감소와 관절통은 덤. 선근증 증상이 함께 있어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자궁 밖에서 이 난리가 났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컨디션이 들쑥날쑥해도 내 런던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하는 날들은. 내가 통증에 너무 무뎌진 걸까? 아프면 그냥 그러려니 진통제를 먹었고 피곤하면 잠을 더 잤다. 그러다 올 겨울부터 몸이 심상치가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올 2월에 영국에서 한 MRI 정기검진 결과가 좋지 않았다. 의사에게 검사 결과 설명을 듣는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놈의 난치병은 왜 자꾸 나를 따라다니는 걸까. 도대체 왜. 술 담배도 하지 않고 몸에 나쁜 음식은 되도록이면 먹지 않았다. 해가 없는 영국의 겨울 날씨가 나와 맞지 않는 걸까 아니면 한국의 병원보다는 긴 영국의 정기 검진 텀이 문제인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한국 가족들은 고민할 것 없이 한국행을 결정해야 한다며 나를 설득하였고 나도 이제는 마음이 지쳐서 내 고향 음식을 먹으며 가족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마음을 그렇게 결정하고 나서도 한 일주일은 하루에 몇 번씩 이유 없는 눈물이 났다. 툭 치면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기분. 11년의 영국 생활이 이런 식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아쉬운 마음도 컸고 당장은 함께 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도 컸다. 무엇보다 지금 먹고 있는 호르몬 약의 부작용도 한몫했던 것 같다. 저번 주에는 자살 충동이 강하게 들어 남편이 재택근무를 해야 했다. '와 나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이 미적지근한 온도의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점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죽는 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치도 없는 병, 걸리는 사람은 많지만 그렇다고 치료제가 다양하지도 않은 병, 이로써 삶의 질은 급격하게 떨어지지만 겉으로는 딱히 티가 나지 않아서 사람들은 잘 모르는 병. 이렇게 오로지 나만 아는 사투를 벌여야 하는 외롭고 미적지근한 병.
일주일을 그렇게 끙끙대며 마음 몸살을 앓던 어느 날, 무거운 마음과 몸을 이끌고 출근하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빈자리에 앉아 멍하니 정면을 바라봤는데 맞은편에 앉아 계신 분이 서럽게 울고 계셨다. 누가 봐도 장례식에 다녀온 복장으로 고개는 푹 숙인 채로. 여섯 정거장을 지날 때까지 계속 흐느껴 우셨다. 나도 요 며칠간 서러웠는데 갑자기 나의 슬픔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일터에 가는 내내 이래도 되는 건지, 남의 슬픔과 눈물을 통해 나의 슬픔을 경감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내 슬픔을 덜어 낯선 이에게 투척하는 감정이 들었달까.
집에 돌아와 남편과 이야기를 하며 깨달았다. 그날 내가 받은 게 위로였다는 걸. 낯선 사람의 눈물을 보며 나도 모르게 연민의 감정을 느낀 것이었다. 아, 이 울퉁불퉁한 자갈밭이 꼭 내 앞에만 있는 게 아니구나. 그 누구도 깨끗한 평지만 있는 인생을 가질 수는 없는 거구나. 아무리 밝아 보이는 사람이어도 모두 다 한켠에는 그들만의 자갈밭이 있다는 걸 내 고통에 잠식되어 잠시 망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의 내 상황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나한테 일어난 것일 뿐, 내 인생에 대한 형벌도 응징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를 다시 일으켜 양지로 데려온다. 지난 5년간 그랬던 것처럼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시 영차영차 헤쳐나가야 한다는 걸 마음으로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한동안은 자갈밭이 계속될 것 같으니 신발끈을 단단히 고쳐 메고 크게 심호흡을 해야겠다. 1년 후에는 더 단단한 모습의 내가 되어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