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와 결핍

by 박보람


13년 만에 자궁내막증 신약이 개발되어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그 약의 이름은 RYEQO 라이코. 루프린 주사 성분과 에스트라디올, 프로게스테론이 적절히 혼합되어서 폐경 상태를 유지하지만 골밀도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게끔 만든 약이다.


저번 주부터 이 약을 먹게 됐다. 한국에서는 괜찮았는데 영국에서 받은 정기검진에서는 미레나를 해도 조금씩 하는 생리와 증가하는 통증이 적신호라며 자궁 적출을 하지 않고 폐경 때까지 가려면 이 약을 꼭 먹어야 한다고 했다. 폐경 때까지 자궁을 지키기 위해 미리 폐경을 연습해야 한다는 게 아이러니했지만 알겠다고 했다.


미레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의사가 early pregnancy & acute gynae로 나를 연계해 줬다. 보통 산과와 부인과는 나뉘어 있는데 급하게 초음파를 보려고 하니 그냥 비어 있는 자리에 나를 껴넣은 모양이다. 어찌 보면 산모들이 가는 응급실인데, 그 웨이팅룸에서 산모들에게 둘러 쌓인 나의 모습이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져 기분이 묘했다. 건강한 생명의 탄생을 기원하는 설렘 가득한 곳에서 큰 이벤트 없는 잔잔한 폐경의 길을 기원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보자니 웃음이 안 날 수가 없다.


한국도 영국도 검진 때마다 아이 생각이 있으면 fertility 닥터를 연계해 줄 테니 고민하지 말라고 한다. 조쉬는 아이를 원하지만 내 눈치를 보느라 티를 못 내고, 나는 내가 더 중요해서 내 몸을 혹사시켜가며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 생명의 씨앗이 '엄마, 아빠, 나 좀 만들어 주세요'라고 요청할 일은 없고, 결국에는 나와 조쉬의 욕망이 씨앗을 만들어 그 연약한 생명을 희로애락의 궤도 위에 올려놓아야 하는데 그게 못할 짓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가여워서. 아무리 잘 키워도 결핍이 없는 어른은 이 세상에 없다는데 임신과 육아는 나에게 미리 틀릴 걸 알고 치는 중간고사처럼 느껴질 뿐이다. 어른은 아이에게 정말 잘해야 한다. 네가 요청하지 않았지만 내가 원해서 너를 세상에 나오게 했다는 그 책임감 하나로 진짜 진짜 잘해야 한다.



새로운 약에 감정이 동요 치고, 그러는 가운데서도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을 계획해야 해서 엄마에게 아침 일찍 영상통화를 걸었다. 엄마랑 이 시간대에 통화를 잘 안 하는데 아주 오랜만에 한 것이다. 나는 엄마가 그 시간대에는 늘 바쁠 줄 알고 그동안 일부러 다른 시간대에 연락한 거였는데 내가 큰 착각을 했다는 걸 느꼈다. 자식들이 다 떠나간 집에서 일흔이 다 되어가는 엄마는 더 이상 예전처럼 바쁠 일이 없었고 혼자 개천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왜 하필 내가 오랜만에 전화한 날 엄마는 혼자였던 걸까. 왜 혼자 쓸쓸히 개천가에 앉아있는 건데. 엄마의 귀가 먹먹해 통화는 알맹이 없이 황급히 마무리되고 딸은 지구 건너편에서 멍하니, 엄마는 개천에서 멍하니, 그렇게 앉아있었다.


마음이 먹먹했다. 차라리 귀가 먹먹한 게 나은 걸까 싶을 만큼 먹먹한 마음을 붙들고 하루를 시작했다. 삼십 년을 훌쩍 넘게 살아도 채워지지 않는 이 허기와 결핍을 부둥켜안고 이 쓸쓸하고 애연한 마음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 또 물려줄 수 있을까, 그건 못할 짓 같아- 고개를 저으며 약을 삼켰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조쉬의 눈을 마주칠 때마다 석연치 않은 기분도 든다. 조쉬가 나에게 대놓고 “보람, 우리 아이를 가져보자!”라고 말한다면 내 마음이 오히려 좀 나을까? 조쉬를 믿고 이 허기진 마음을 내 아이에게만큼은 물려주지 않을 거란 다짐으로 잘 키울 수 있을까? 여전히 사랑을 갈구하는 서른 중반의 어른에겐 이 모든 게 너무나도 큰 산처럼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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