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대하여

by 박보람

요즘 너무 많은 꽃들이 지는 것 같다. 가끔씩 켜보는 한국 뉴스에서 아직 갈 때가 아닌 누군가의 부고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역만리에서 제삼자의 입장으로 보는 한국 사회는 용서가 전혀 안 되는 사회 같다. 용서라는 단어가 허용되지 않고 폭력이 난무하다. 이십 년 전에도, 십 년 전에도, 그때도 같은 이유로 불필요하게 먼저 져버리는 꽃들이 많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한 치의 변함없이 그대로인 사회가 매스껍다. 이런 정글 같은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성인이 될 때까지 버텼던 걸까.


한국의 낮은 출산율은 전 세계적으로도 흥미로운 주제라 영국인들과의 대화에서 종종 화두가 되곤 한다. 내가 "맞아, 한국의 출산율이 좀 낮은 편이지."라고 부드럽게 말하면 영국인들은 빼박 "아니 낮은 편인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낮던데?"라고 못을 박는다. 그리고 나에게 그 이유가 뭐인 것 같냐고 물어본다. 사실 거기에 대해 할 말은 아주 많은데 내가 나고 자란 고국에 대해 험한 말을 하기 싫어서 대충 얼버무린다. 경쟁이 심한 사회라 그래, 아직 임신과 출산을 겪은 여성들이 사회에 복직하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아서 그래, 육아 휴직을 마음껏 쓰기도 아직은 좀 힘든가 봐. 그래도 점점 좋아지고 있어!라고. 당연히 이런 대화를 하고 난 뒤에는 하늘을 찌르는 한국의 위상과는 별개로 마음이 쓰리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주기적으로 보이는 부고를 보면 확실히 알 것 같다. 왜 한국의 출산율이 이렇게 낮은 건지. 이렇게 폭력적인 사회에서는 나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평생을 수도자로 산 바티칸 교황님도 때때로 잘못을 하고 만인의 앞에서 용서를 구한다. 그런 게 사람이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고 용서를 구한다면 누군가는 그 용서를 받아줘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이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나는 한국에서 그렇게 서로를 아껴주고 보듬어주면서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게 사회라고 배웠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교과서와 현실 세계 사이의 괴리감은 너무나도 크다. 내가 낳은 아이가 한국에서의 그 힘든 교육을 받고 겨우 성인이 되었는데 단 한 번의 실수로, 잘못으로 다시 사회에서 발붙이고 살기가 힘들어진다면. 죗값을 치르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언어폭력을 당해야 한다면. 그냥 안 낳고 말겠다. 나는 하나의 흠도 없는 완벽한 사람을 낳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의 입장에서도 어렸을 때는 밥만 먹고 똥만 싸도 예뻐해 주던 어른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나의 적대관계에 서서 과오를 쉽사리 용서해 주지 않는 사람들로 비친다면 그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 것 같다.


차라리 한국 사회에서 용서가 의무가 되어버리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말로 사람을 때리는 자들에 대한 더 구체적인 조치가 취해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댓글창을 닫아버리는 그런 일차원적인 방법 말고. 그들도 다른 이들의 폭력이 낳은 또 다른 폭력일 테니. 반창고를 겹겹이 발라 상처를 가려버리는 그런 짓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왜 이런 상처가 났을까, 어떻게 하면 이 상처가 온전히 나을까, 반창고 아래를 유심히 바라봐주는 힘 있는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 산책하면서 든 또 다른 엉뚱한 생각은 말로 때릴 거면 차라리 꽃으로 때리라는 거다. 누군가를 때리러 꽃을 사러 가는 과정에서, 꽃을 고르며 향긋한 냄새를 맡는 시간 속에서 폭력이라는 게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얼마나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고 허전하고 쓸쓸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본인을 위한 예쁜 꽃 한 송이를 골라보시길. 그게 곧 용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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