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수업 첫날, 무조건 있는 통과의례가 있다. 선생님은 모두에게 독일어를 공부하는 이유를 묻는다.
"왜 독일어를 공부하세요?"
수강생 한명 한명 대답하는 걸 들어보면 대부분은 유학·이민·졸업요건 등 명확한 이유가 있다. 그 사이에 '그냥'이라는 대답으로 끼어있는 게 나다. 그런 내게는 같은 질문이 두 번 온다. 처음 물을 땐궁금증을 담았다면 이번엔의아함을 담아서.
"왜 독일어를 공부하세요?"
왜 나는 독일어 학원에 등록했을까? 똑똑하거나 지적호기심이 넘치는 뭐 그런 사람도 아니다. 영문과 출신이지만 4학년때 토익 학원까지 다녀가며 간신히 만든 토익점수가 800점이었으니. 외국인과의 영어회화도 어버버거리는 나는 확실히 공부가 희열인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돈이 남아도는 사람도 아니다. 굉장하게 박봉인 회사에 다닌다. 규모 면에서도 굉장한데, 중소도 아닌 초소형 회사에 다니고 있으며 구성원은 셋이다. 그래서 매출이 휘청일 때면 일하는 시간이 절반으로 훅 줄어든다. 물론 월급도 같은 비율로 훅 줄어버린다.
그럼 이직을 위해 공부하나? 역시 말도 안된다. 독일어는 쓰이는 국가가 거의 없다시피해서 한국어만큼이나 돈이 안되는 언어다. 게다가 나는 이직하고자 하는 용기도 노력도 없는 자다.
사회에 찌들었기 때문일까? 회사를 개근하면 화나지만 학원을 개근하면 뿌듯하다. 사회의 일꾼이 되어보니 학원 개근만큼 잘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일이 재미없는 나에겐 집중할 것이 필요했나보다. 연필로 마구 쓰면서 중얼중얼 외우다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비워진다. (다행히 머리는 독일어로 잠시나마 채워지긴 한다.)
수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 스님이 오셔서 염불을 외워주셨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반야심경이 잔뜩 적혀있는 종이를 다함께 박자 맞춰 중얼중얼 따라하다보면, 슬픔이 가득했던 마음이 비워지고 차분해졌다. 나는 무교이지만 왜 사람들이 종교에 미쳐 사는지를 알 것 같았다.
나한테 그런 게 필요했던 게 아닐까? 인생에 도움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냥 이유 없이 해보고 싶은 취미 같은 거. 굳이 잘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 노력은 조금 해서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는 그런 취미. 하루 종일 열과 성을 다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나에게 성공적인 등원만으로도 작은 보람을 주는 독일어. 아, 이러니 학원에 개근할 수밖에. 선생님 개근상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