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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스케치 024] 장인정신을 말하다

안병민의 [통찰을 스케치하다]

2011년 가을, 전남 순천 시내에서 27km 떨어진 조용한 절 선암사에 난리가 났다. 갑작스레 사람들의 문의 전화가 빗발쳤고 선암사 홈페이지도 접속 폭주로 다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모든 게 바로 이 사람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즐겨보는 어느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고향처럼 푸근한 절집”이라며, 선암사를 자신이 다녀 본 문화유산 중 최고라고 얘기해버린 탓이었다. 유홍준 교수 얘기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그는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며 오늘도 여기저기 삶의 곳곳에 숨어있는 고수들을 만나 깨달음을 얻는다 했다. 그런 그를 만나 《명작의 조건과 장인정신》에 대해 들었다. 유홍준 교수와의, 강의를 통한 그 지적 만남을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 먼저 우리 나라 문화예술의 아름다움부터 짚어봐야 할 거 같다. 


“삼국시대 얘기를 좀 할까? 삼국시대의 명작은 고분 미술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서기 300~500년에 해당하는 시기는 고분 미술의 절정기였다. 고대왕국에 있어 왕의 무덤에 들어가는 물건들의 가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신라 고분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목걸이는 지금의 명품브랜드 디자인과 비교해도 결코 빠지지 않는다. 이른바 ‘명작의 현재성’이다. 명작은 세월의 때를 타지 않는다.”


▶ 당시 이런 명작들이 나오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백제 시대에는 장인을 존중했다. 무령왕릉 왕비의 팔뚝에서 나온 은팔찌에는 그걸 만든 장인의 서명이 새겨져 있다. 왕비의 팔찌에 자필 서명을 할 정도로 장인에 대한 존경이 있었던 거다. 경학에 밝으면 경학박사라고 했고 기와를 잘 구워내면 와(瓦)박사라고 존중했던 나라가 백제다.” 


▶ 백제의 명작들에 대해 좀 더 소개해 달라.


“백제 금동대향로를 보면 용이 용틀임을 해서 연꽃 봉오리를 입에 물고 그 위로 봉황이 날아가는 형상이다. 디테일을 보면 궁극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단지 보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향로의 최종 형태는 향을 피웠을 때 어떤 모습인지가 중요하다. 청자 향로는 보통 뚜껑을 사자나 기린, 오리 모양으로 많이 만드는데, 그 뚜껑의 짐승 몸통이 비어 있어서 그 동물의 입으로 향 연기가 나간다. 이 연기가 턱과 입을 거쳐 다시 위로 뻗어 나가는, 그 모습이 보여주는 미의 수준은 궁극의 황홀경이다.”


▶ 백제 미술의 수준이 가히 세계적이다.


“아무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백제가 궁궐을 지은 사실을 기술하면서 쓴 말이 일품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 하여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고 했다. 이 여덟 글자 평은 백제 예술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미감을 대표할 만한 명구다.” 


▶ 이제 ‘장인정신’으로 말머리를 돌려보자.


“개념보다는 눈에 보이는 작품으로 설명하는 게 나을 것 같다. 흔히 에밀레종이라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은 만들어진 지 1,200년이 넘도록 아직 깨지지도 않고 제 기능을 다한다. 이 사실만으로도 가히 명작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소리다. 에밀레종의 소리를 들어보면 ‘웅웅웅’ 하면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가 끝없이 반복된다. 그 덕에 여운이 오래 가고 소리가 끝없이 뻗어 나간다. 이걸 ‘맥놀이 현상’이라고 하는데, 종에서 진동이 다른 두 개의 소리를 나오게 하는 게 그 비결이다. 이 두 소리가 서로 간섭하면서 강약을 반복하게 되고 이렇게 함으로써 소리를 먼 데까지 보낼 수 있게 되는데, 이게 기술이다. 과학자의 정밀한 분석 끝에 이 종의 상하와 배 부분이 두께가 다른 것을 발견했고, 두 개의 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것 때문인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신라인들이 이처럼 고도의 계산을 한 것이 놀라운데, 이런 첨단의 기술이 어떻게 나왔겠는가? 바로 ‘장인정신’의 총화다.”


▶ 신라에도 장인들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었나?


“장인들에 대한 존중은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이 성덕대왕신종 비천상에는 1,037자로 된 명문이 있는데, 여기를 보면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여덟 명의 이름과 관직을 쓰고 주종 기술자 네 명의 직책과 이름을 밝혀 놓았다. 장인들이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이다. 당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빚으면 불상이 되고 부처님의 목소리를 만들면 그게 곧 종소리였다. 그런 절대자의 거룩한 목소리를 재현해 내기 위해 당시 사람들이 들였을 공력과 노력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 ‘장인정신’을 보다 쉽게 설명한다면?


“추사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 말이다. 추사체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엉망진창으로 쓰는 글씨 같다. 그럼에도 추사체를 천하의 글씨체로 칭송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장인적 수련’이다. 그가 그의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그런 수련 속에서 추사체가 나온 것이다. 결론은 노력이다. 명작에 스며있는 개성도 장인적 수련 과정을 거친 후에 의미가 있다. 피카소 박물관에 가 봐라. 피카소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그림을 잘 그렸는지 알 수 있다. 그런 뼈를 깎는 수련의 과정이 있었기에 나중에 괴물 같은 여자를 그려도 멋있다고 하는 거다. 장인적 수련 위에 개성을 더한 게 피카소의 그림이다.” 


▶ 장인정신이 보여주는 외형적 특징도 있을 듯 한데.


“디테일이 아름답다는 점이다. 남다른 기술과 재능을 가진 장인들이 자신의 작업에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건 거의 본능적인 것이다. 대충 해놓고 끝낸다? 장인정신이란 이름 아래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20세기 최고 건축가 중의 하나인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로에는 “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라고 했다. 장르를 불문하고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고, 그건 장인정신이 끝까지 구현되어 나타난 결과다.”


▶ 그런 디테일이 잘 살아있는 문화유산, 어떤 게 있을까?


“수학여행의 필수코스인 경주 불국사가 대표적이다. 불국사 대웅전 정면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옆면을 봐라. 여인의 한복 저고리 소맷단을 본떠 만든 그 문양이 기가 막히다. 살짝 하늘로 공고른 곡선의 아름다움에서 숨어있는 디테일의 미를 보게 된다. 석가탑은 또 어떤가? 석가탑의 아름다움은 바로 우아한 부드러움이 있으면서도 견실한 힘이 느껴지는 디테일의 묘다. 극락전 안양문에서 연화교를 내려가다 보면 연꽃무늬가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데, 이 또한 일품이다. 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미친 장인의 손길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 그런 명작이 나오려면 시급히 고쳐야 할 문제가 무엇일까? 


“사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문제가 크다. 우리나라 유명 건축가 세 사람 이름을 댈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월드컵 경기장만 해도 모 재벌기업이 만든 걸로 인식되고 있다. 건축을 맡았던 건축가의 존재는 사라지고 없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어떻게 명작이 나오겠는가?”


▶ 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아직 낮은 게 사실이다. 현실적 대안이 있을까? 


“요즘 다들 복지, 복지 외치는데, ‘문화복지’란 개념을 생각했던 적이 있다. 누구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펼치는 복지정책 개념이다. 예컨대 문화재청 이름도 문화재복지청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 이름에서부터 정책의 지향점이 드러나면 의식도 바뀌게 마련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국립박물관의 무료입장 정책에도 아쉬움이 크다. 국립박물관이 무료로 개방되면서 400여 개의 일반 사설미술관, 박물관 운영이 힘들어졌다. 게다가 무료로 입장하니 문화재의 가치에 대한 인식도 오히려 낮아졌다. 해외 선진국들을 살펴봐도 영화관람료와 비슷한 수준의 입장료를 받으면서 주 1회 무료 개방을 한다. 자국 문화재에 대한 가치는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문화복지까지 고려한 정책인 것이다.”


▶ ‘명작은 장인이 아니라 소비자가 만든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내가 문화재청장을 맡고 있을 때, 덴마크 여왕이 방한한 적이 있다. 그 때 하얏트호텔에서 대규모 만찬이 열려 갔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0여 개의 요리가, 그것도 커피까지 모두 덴마크의 고급도자기인 로얄코펜하겐 식기에 담겨 나온 거다. 마침 옆자리에 앉아있던 덴마크 대사 부인에게 이 식기들을 다 어디서 빌려왔냐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여왕이 올 때 비행기에 함께 실어왔다는 거다. 순간,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나라의 왕가에서 문화적 명작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다. 우리는 어떤가? 장인들 보고 일 똑바로 하라 다그칠 게 아니라 소비자가 장인을 제대로 대접해야 한다. 그 가치를 인정해주고 비싸게 사주는 소비자가 있을 때 명작이 탄생한다.”


▶ 실로 놀라운 이야기다. 자국의 명품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다. 


“더 웃긴 뒷이야기가 있다. 보통 여왕의 해외 순방에 동행하는 로얄코펜하겐 식기들은 그렇게 제 역할을 다한 후 현지에서 경매에 부쳐진다. 덴마크 여왕이 직접, 그리고 해당국의 명사들과 함께 사용했던 식기라는 스토리가 덧붙여져 정상가보다 더 비싸게 판매되는 게 일반적인데, 우리나라에선 그런 문화가 없다. 중고품이라 오히려 30% 할인된 가격에 팔렸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이천 쌀밥이 유명하다고 해서 모 식당엘 갔는데 플라스틱 밥그릇에 담겨 나오는 쌀밥을 보고 혀를 찼던 기억이 아직도 아프다.”


▶ 결국 명작은, 그리고 장인정신은 장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대에 장인정신이 없다면 그건 장인을 탓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달라져야 한다. 국가시스템도 최선을 다한 작품이나 사람이 대접 받고 존중 받을 수 있도록 개선되어야 한다. 이런 게 보장될 때 우리 시대의 장인정신이 구현되고 우리의 문화능력이 커지는 거다. 명작은 그렇게 우리가 함께 만드는 것이다.” 


유홍준. 그는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사랑하고 그 미감을 함께 나누려고 노력하는, 천생 미술사학자였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더 많은 명작들이 나오고 그 명작들의 아름다움을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문화복지 전도사였다. ‘Work Hard’의 시대는 가고 ‘Work Smart’가 대세인 요즘, 정작 중요한 것은 ‘하드’한 연습과 수련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스마트’한 과정으로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의 얘기를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 스마트 디바이스로 무장했다고 스마트한 결과물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거다. 유홍준이라는 문화예술 상수(上手)를 만나 명작과 장인정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오늘, 왠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목적지는 아마 경주 아니면 부여가 될 듯 싶다. ⓒ보통마케터안병민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경영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그래서 캐주얼>,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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