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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5분혁신=안병민] 행정안전부에서 발족한 <주소기반 혁신성장산업 전문가포럼>에 초대받았습니다. 연구 결과물을 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의 에디터 및 총괄 감수 역할이었습니다. 그 결실이 <주소가 바꿀 미래사회와 산업>이란 책자로 발간되었습니다. 대략 180페이지 분량입니다. 저 역시 많은 걸 보고 배운, 귀한 경험이었는데요. 책자에 들어간 에디터로서의 제 글을 가져 왔습니다. 주소가 바꿀 세상이 궁금하시다고요?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 도서 [주소가 바꿀 미래사회와 산업] 전문 읽기 및 다운로드 : https://bit.ly/3RaZYmM
[에디터의 글 : 주소의 해상도가 높아진다]
장면 하나. 때는 시간을 거슬러 1988년, 까까머리 고등학생 A. 여자친구가 생겼다. 한참을 같이 있어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 지금이라면 스마트폰으로 밤새 통화라도 할 수 있을 터다. 집집마다 한 대씩 있는 유선전화로 장시간 통화를 했다가는 88년 당시로선 어른들의 불호령이 뻔했다. 대안은 편지였다. 사위가 무겁게 가라앉은 늦은 밤, 한 자 한 자 꼭꼭 눌러가며 정성스레 쓴 편지를 그녀에게 부친다. 그녀의 마음에 띄우는 A의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은 그녀에게 닿지 못한다. 그녀 집 우편함에 들어간 A의 마음을 그녀의 엄마가 먼저 발견해서다. 그녀가 부친 그녀 마음 또한 마찬가지다. 풋사랑의 열병을 앓는 A에겐 하루하루가 힘든 시간이다.
장면 둘. 30대 직장인 B. 그렇지 않아도 숨 막히는 직장 생활. 우연한 계기로 접하게 된 무선조종 자동차는 한 줄기 빛이다.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한 방에 사라지는 느낌에 조종간을 놓을 수가 없다. 문제는 아내다. 사실 꽤나 부담스러운 가격의 무선조종 자동차. 처음 한 대는 아내도 그러려니 이해해줬다. 하지만 이쪽 세계가 어디 그리 만만한가. 시작을 안 했다면 몰라도 이왕 발을 딛고 보니 처음 샀던 차는 말 그대로 초보자 입문용이었던 것. 두 번째 차를 샀다. 훨씬 더 많은 기능이 있어서인지 가격도 두 배. 아내에겐 비슷한 금액이라 일단 둘러댔다. 그렇게 두 대를 가지고 나름의 주행을 즐겼지만 이미 알아버린 RC카의 세계. 더 이상 이 아이들로 만족할 순 없다. 세 번째 차가 필요한 시점. 아내의 잔소리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집으로 배송을 시킨다는 건 매를 버는 일이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회사로 자동차를 배송받아 몰래 작은 방 옷장 뒤에 숨겨두었다. 그런데, 이런. 출근한 내게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내의 날 선 목소리. 맙소사, 들켰다.
안쓰러운 두 개의 장면. 둘 다 문제는 단순하다. 주소가 원인이다. '거주장소'로서의 주소와 '수령장소'로서의 주소가 분리되지 않아 생긴 비극이다. 잘 생각해보면 주소란 게 그렇다. 주소는 '사는' 곳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온라인 쇼핑과 음식 배달이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 주소는 곧 물건이나 음식을 '받는' 장소이기도 하다. 의미와 용도가 다른 두 가지 개념이 하나의 주소에 묶여 있다. 주소의 해상도가 낮아 생기는 사용자의 불편이다.
해상도는 화면에서 그림이나 글씨가 어느 정도 정밀하게 표현되는지를 나타내는 단어다. 보통 1인치 안에 들어있는 화소의 수로 표현한다. 해상도가 높으면, 라이언킹의 탐스러운 갈기 한 올 한 올이 선명하게 보인다. 해상도가 낮으면, 대학생 손자도 돋보기를 쓰시는 할아버지의 노안을 실시간으로 체험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도 해상도가 있다. 많은 단어를 아는 사람은 적은 단어를 아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개념과 현상을 설명하고 표현할 수 있다. 언어 해상도의 차이다. 모든 언어를 다 갖다 쓰더라도 묘사할 수 없는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도 있다. 언어의 해상도가 생각이나 감정의 해상도보다 훨씬 떨어져서다. 내 머리 속 생각이나 내 마음 속 감정을 100%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는 건 그래서다.
주소도 마찬가지다. 지금 쓰는 주소는 해상도가 무척이나 낮다. 그저 사는 곳 정도만 식별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인공지능, 로봇, 드론, 자율주행차, 클라우드, 빅데이터, 블록체인, NFT, 메타버스 등 새로운 IT 개념들이 앞다투어 쏟아진다. '4차 산업혁명' 혹은 '디지털라이제이션'이라 불리는 작금의 변화는 주소 해상도 제고의 원인이자 결과다.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니 주소의 해상도가 올라가고, 주소의 해상도가 높아지니 새로운 기술들이 꼬리를 물고 나온다. 서로가 촉매로서 서로의 발전을 견인한다. 결국 주소는 이 모든 기술들을 우리의 삶과 이어주는 열쇳값인 셈.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그거다. 미래기술과 미래사회, 미래산업의 핵심인프라로서 주소의 역할이 무척이나 크고 중요하단 얘기다.
주소의 해상도가 높아지면 우리 삶의 모습들이 바뀐다. 사는 장소와 받는 장소만 구분되어도 앞서 언급한 고등학생과 직장인의 비극은 사라진다. 다가 아니다. '고정성 장소'뿐만 아니라 '이동성 장소도 주소가 될 수 있다. 가령, 제품을 받을 고객이 어디 있는지 추적하여 배송해주는 택배 서비스가 가능해진다. 이른바 고객추적형 배송서비스다.
비정기적으로 나타나서 몇 시간 영업을 하곤 다른 장소로 떠나버리는 과일트럭 사장님에게 택배를 보내야 한다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던 이런 일이 너무나도 간단해진다. 과일트럭이 시간대별로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파악한 뒤, 효율적인 동선을 산출하여 움직이면 된다. 이 모든 게 주소의 해상도를 높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메타버스도 있다. 가상공간 속 내 아바타가 메타버스 속 서울 명동을 거닐다 맘에 드는 옷가게를 발견하곤 바지를 한 벌 산다. 메타버스 상점에서 산 옷이 현실세계의 내게 배송된다. 받고 보니 생각하던 디자인이랑 다소 다르다. 이 옷을 반품하는 곳은 메타버스 속 그 옷가게 주소다.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요즘, 두 개의 세상을 끊김없이 이어주는 요소 또한 주소다.
'사는' 곳만을 의미하던 주소가 '사는' 곳뿐만 아니라 '받는' 곳, 거기에 '이동'과 '시간', '입체'의 개념까지 더해지며 해상도가 확 올라간다. 현실세계뿐만 아니라 가상공간 주소와도 이어지니 눈이 쨍할 정도의, 극강의 해상도가 되는 셈이다. 주소의 해상도는 미래의 삶, 미래의 비즈니스와 비례관계다. 높아진 주소의 해상도가 빚어낼 새로운 미래는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주소가 바꿀 미래 사회와 산업'. 이 귀한 프로젝트에 에디터로 참여하게 되었다. 주소 관련 각계 전문가들이 힘주어 눌러쓴 통찰의 원고들을 접하며, 주소가 바꿀 미래가 코 앞에 와있음을 느낀다. 물론 주소 혼자서 바꿀 수 있는 미래는 아니다. 앞서 언급한 디지털기술들이 주소에 접목됨으로써 빚어질 미래다. 그럼에도 그 중심에 주소가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주소와 미래를 이어주는 전문가들의 영감 가득한 메시지가 읽는 이에게 보다 명징하게 전해질 수 있도록 원고를 깎고, 다듬고, 매만졌다. 그들의 혜안을 고해상도의 글로 가꾸고, 꾸미는 작업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촉박하여 마음이 바빴다.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주소가 바꿀 미래의 모습이 어렴풋하게나마 그려졌다면 에디터로서 큰 보람이자 기쁨이겠다. 옥고를 기꺼이 내어준 전문가들께도 면이 서겠다. 다른 것 없다. 그러면 되었다. ⓒ혁신가이드안병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