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같이 퇴근길 지하철 안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에서 책을 꺼냈습니다. 어제 마저 읽지 못한 페이지를 펼쳐 계속 읽으려는데, 눈은 글자를 보고 있음에도 마음은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눈 앞의 글자를 억지로 머릿속에 욱여넣고 싶은 생각이 가득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 그런 날. 금세 괜찮아지겠지 라는 생각에 문장과 단어의 흐름에 눈을 맡겨 책 읽는 척해보지만, 한 문장을 언제 읽었는지도 모르겠고, 그 문장을 읽었던 기억도 나지 않아 그 문장만 계속 반복해서 읽고 잊고 읽고 잊고를 반복하는 그런 날이 있습니다. 이런 날은 가방 속에 아무리 재미있는 책이 담겨 있더라도 책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가득한 날이고, 생각이 물밀듯 차오르는 그런 날입니다.
회사에서 있었던 사건, 사고들의 잔재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여전히 마음 한 켠을 콕콕 찔러대는 날이면, 아주 작은 기억과 미련의 잔재를 중심으로 온갖 생각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안 그래도 비우기 힘든 머리와 마음인데, 어찌나 그 틈새를 잘 찾아내 자리 잡는지, 조금의 여유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듯 생각과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면, 들고 있던 책을 도로 가방에 넣고 아무 생각 없이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봐야 합니다.
오늘 꼭 읽고자 했던 책을 읽지는 못하지만, 풍경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못했던 생각을 마음껏 해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려 합니다. 그나마 이런 순간이 있기에,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감을 희미하게나 유지할 수 있구나 라고 안심하기도 하고요.
수많은 생각 중에서도,
생각이라는 건 참 좋습니다. 정리의 순간이 되기도 하고, 다짐의 순간이 되기도 하고, 계기의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상상력을 더욱 넓히고 그 안에서 고민하던 해답을 찾아내는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생각이 물밀듯 차오르다 턱 밑까지 차오르는 바람에 숨이 막혀버리는 순간이 불현듯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다시 떠올리기가 두렵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고 피하고 싶기도 한 그런 기억들. 오래전에 잊혀졌을 거라 믿던 기억이 되살아나 오금을 자극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의도를 가졌던, 그렇지 않든 전달한, 반대로 그들이 나에게 남긴 상처 가득한, 때로는 시간이 지나 떠올리면 그 또한 하나의 추억이라 포장하기도 하는, 씁쓸한 기억들이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죽은 듯 보였던 나뭇가지 끝으로 초록의 형태를 띤 생명이 태어나듯 살아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봄은 희망의 탄생을 의미하지만, 이 기억은 추잡하기 그지없다는 것.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이 기억은 한 번 물꼬를 틀면 끊임없이 확장되어 기존에 있던 기억들 속으로 차곡차곡 자리를 잡아갑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이 서로 엇갈리고 얽히면서 당시의 아픔은 더욱 커지고, 그때의 미련은 더욱 깊어집니다.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생각이 잠잠해질 때까지 생각에 몸과 마음을 맡겨버립니다. 그 순간만큼은 남아 있던 상처와 미련이 나라는 존재의 주도권을 잡게 되지만, 다행인 것은 이들 기억의 활동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 기억이 물밀듯 차오르고 확장되고 흘러가는 순간이 꽤 오랜 시간으로 느껴지지만, 지하철 몇 정거장 정도만 지나면 잠잠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기억의 흐름에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 복잡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미련과 상처가 왜 이리도 많은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그 존재감을 발휘하는지. 언제쯤이면 상처가 흉터도 남지 않을 정도로 치유되고, 미련으로 바닥을 긁지 않을 정도로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