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앞두고 바꾼 고슬고슬한 침대보가 살과 맞닿는 느낌은 꽤나 자극적입니다. 그냥 보기에도 눅눅한 장마 정도는 가볍게 이겨낼 것 같은 침대보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에 훌륭한 매개체가 됩니다. 하루를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책상에 앉아 머리와 손을 쓰는 일이 많은 사무직 직장인인데도 퇴근 후 누울 시간이 되면 100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이 가쁘고, 10킬로미터 단거리 마라톤을 뛴 것처럼 아릿한 근육통이 종아리 아래부터 이로 급격히 치솟아 오릅니다. 통증이 종아리를 거쳐 엉치뼈를 감싸고 있는 근육을 지나 예전엔 날개가 달렸었음직한 위치의 어깻죽지 인근에 다다르면 고슬한 침대보가 저를 반겨줍니다. 통증이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의미해주는 삶.
생각보다 잠은 일찍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시달린 몸과 마음에 빨리 안식이라는 달콤함을 전달해주기 위해서는 우선 눈꺼풀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감을 느껴야 하지만, 이상하게 고슬한 침대보의 효과 덕분인지 여전히 멀쩡한 머릿속엔 직장에서부터 이어온 생각이 계속 맴돌 뿐입니다. 잠들어야 하는 시간은 다가오는데 정신은 멀쩡하고 눈꺼풀의 무게감은 1도 없는 이 시간. 다시 일어나 컴퓨터를 켜야 하나, 온갖 콘텐츠로 유혹하는 스마트폰을 켜야 하나 고민을 하게 됩니다.
옆자리에서 말소리가 들려옵니다. "안 자?"
이에 저는 대답합니다. "조그만, 지금 잠을 숙성시키는 중이야."
꽤 오랜 시간, 출근과 퇴근 사이의 시간 동안 직장이라는 공간에 머물면서 꽤 다양하고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받아오고 있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감정의 흔들림만큼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한 낡은 서랍 속에 넣어버릴 수 없는 사람. 그냥 별 다른 생각 없이 퇴근 시간 즈음이 되면 서랍에 넣었다가 다음 날 다시 출근하면 서랍에서 꺼내 어제의 감정을 그대로 이어가는 사람. 그런 삶에 익숙해져야 어른이라고 인정받는 세상. 그 세상이 전부라 믿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세상의 정의라고 믿어야 하지만, 그렇기 싫어서, 이성보다는 감정에 더 많은 마음을 할애하고 싶어서, 오늘도 낡은 서랍을 열지 못하고 격양된 감정을 집으로 가져와야만 했습니다.
까슬한 목젖을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씻겨내 볼까? 피부 이로 얇고 습한 장막을 만든 것처럼 삐져나온 식은땀을 찬물로 벗겨내 볼까? 격양된 감정을 달래는 일반적인 방법은 많지만 그중에서 지금, 제일 필요한 건 무엇보다 침대에 누워 어서 빨리 감정이 느림의 리듬을 찾아 내려오기를, 하루 동안 수많은 상황을 직면해야 했던 시각에 어서 빨리 안식을 주는 상황을 만드는 것. 고슬고슬한 침대보에 몸을 감고 열어 놓은 문을 통해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빨아들여 서서히 잠을 숙성시키는 것. 독한 알코올로 감정의 필름을 갑자기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꿈을, 희망을 품고 살았던 10대의 리듬으로 안착시키는 것. 그땐 그랬는데 생각과 동시에 경직된 얼굴에 슬쩍 미소를 지어보는 시간. 너무 많은 것을 하루 동안 봐야 했던 각막에 쉼을, 너무 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 했던 머리에 자장가를 들려주는 시간.
저는 이를 '잠을 숙성시키는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자야 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