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기숙사로 떠난날 나는 펑펑 울었다.
홀로 남은 첫날 아침이다. 집 안엔 '스르륵스르륵' 슬리퍼 끄는 소리만이 어색한 적막을 흔든다. 수능이 끝난 뒤 아들하고 영화도 보고 맛집도 가며 즐겁게 보냈는데 벌써 3월이다. 게으름 덕에 아직 치우지 못한 크리스마스트리 전구를 켜 언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여본다.
며칠 전 나와 남편은 먼저 기숙사에 들러 필요한 짐을 미리 들여놓았고 이제 아들만 기숙사로 떠나면 된다. 올해 대학새내기가 된 아들은 열차에 오르며 오히려 담담했다. 나는 흡사 '20년간 짝사랑한 첫사랑'과 이별하는 기분마저 들어 적잖이 당황했다. 곁에 있을 때 좀 더 잘해줄걸... 이제와 후회가 되었다. 그렇게 어젯밤, 아들은 기숙사에서 나는 집에서 각자의 '낯선 첫날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열려있는 아들 방을 보곤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간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왠지 그 물건들을 통해 아들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아들이 아끼던 것들이었으므로.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제 아들을 역까지 배웅하고 집에 돌아와 나는 '펑펑'울었다. 늘 아들 앞에선 센 척했지만 속마음은 너무도 보잘것없이 나약했다. 나는 이렇게도 약한 마음으로 엄마라는 갑옷을 입고 20년을 버텼나 보다. 나는 버텨낸 나 자신이 너무도 대견했다.
나는 조금 특별한 나르시시스트 엄마 밑에서 자라 '보통엄마'가 어떻게 아이를 대하는지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다른 엄마들이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하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을 학습해 따라 하는 수준이었다. <"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야. 그것만으로 충분해"> <"실수해도 괜찮아, 엄마도 매일 실수하는 걸, 걱정하지 말고 도전해 보렴"> <"엄마, 아빠는 늘 네 편인 거 잊지 마, 우리는 언제나 네 뒤에 있어"> <"고마워! 엄마, 아빠 아들로 와줘서">등등 말이다. 불행히도 나는 이런 메시지와는 정반대 되는 메시지들로 키워졌다.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내 각고의 노력 끝에 바르게 성장한 아들을 보며 나름대로 '보통엄마'노릇은 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걸로 된 건데.. 그동안 너무도 노력을 기울여서일까? 더 이상 노력할 대상이 없다는 것에 큰 상실감이 밀려왔다. 이런 순간을 자주 상상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었기에 현실로 닥쳐도 덤덤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여러 날들을 이 상실감과 마주해야 할 것 같다. 싸워서 이길 생각은 전혀 없다. 이 상실감은 싸워 이길 대상이 아니라 다른 것들로 채워야 할 대상이다. 그동안 수험생 아들에게 밀려 아내의 관심 밖이었던 남편에게 조금은 신경을 써 주려고 한다. 며칠 전 출근길에 남편의 뒤꿈치가 내 시선을 끌어 보니 양말 뒤가 닳아 살이 비칠 지경이었다. 나는 아들을 보낸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훌쩍거리며 핸드폰 쇼핑몰 어플을 켰다. 우선 예쁘고 질 좋은 고급 양말 세트를 주문했다. 도착하면 양말 정리함에 잘 정리해 넣어 둬야겠고 생각하며 또 금세 미소를 띤다. 옛말에 울다가 웃으면 어찌 된다고 했는데, 아들을 보낸 상실감은 핑계이고 혹시 나는 쇼핑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스스로를 제대로 인정해 줘야겠다. 척박한 마음밭에서 '아들이란 꽃 한 송이'를 피워낸 20년간의 노력을 말이다. 내 부족한 마음밭에서 크느라 아들도 애썼지만, 그 씨앗을 지켜내고 물과 햇빛을 적절히 주어 어엿한 대학생으로 꽃 피우기까지 나 또한 고군분투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보통엄마'는 내게 마치 '사막 신기루'같아 더 비현실적인 목표처럼 느껴졌고 내 엄마를 닮아버린 내 모습을 깨닫곤 포기하고 싶은 날도 많았다. 하지만 '보통엄마'라는 숙명은 나에겐 포기할 수 없는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지난 20년, 나는 태생부터 부족한 존재라는 자각 때문이었을까? 너무나도 애를 썼다. 어쩌면 투입된 에너지에 비례해 상실감도 큰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당분간은 '개인적 에너지'를 충전해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소모된 나를 충전시켜 주는 방법에 대해 50세인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이것은 현재 진행 중인 나의 또 다른 인생 숙제이다. 나에 대해 알아가는 것 말이다. 이런 현상은 나르시시스트 엄마 밑에 자란 딸들이 자주 겪는 문제 중 하나이다. 나는 작은 것이라도 개인의 취향에 대해 연구원처럼 면밀히 탐구해 보려고 한다. 나를 위해 무언가 노력한다는 것이 나는 좋다.
<"아들이 오는 날을 기다리기보다, 나를 찾아갈 날들을 기대해 보는 내가 되고 싶다. 인생은 짧다. 인생전반기가 조금 어려웠으니 인생후반기는 조금 수월할 것이다.">라는 나의 고백을 읽고 누군가는 그저 번지르르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또한 자주 그랬다. 그냥 내 뇌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자동해석 하던 세월이 모래알처럼 셀 수 없이 많았다.
나는 그렇게 늘 부정적이던 내 뇌의 가르마를 다시 타고 있다. 결대로 흐르던 부정적인 생각의 길을 새로 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20년간 아이를 키우며 했던 치유의 과정을 한마디로 말해보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말할 것이다. "나는 20년간 뇌의 가르마를 다시 탔어요". 이게 내가 아이를 키울 때 가장 힘들고,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현재에도 의식하고 진행 중이다. 무의식 중엔 생각이 자꾸 예전의 가르마가 만든 길로 가기 때문이다.
처음 어린 아들에게 <"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야. 그것만으로 충분해"> 이런 말을 했던 그날이 또렷이 기억난다. 내 입에서 이 말을 내뱉을 때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건 이 말 자체가 거짓이라서가 아니다. 나는 저말 그대로 아이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내 뇌는 내가 그렇게 생각하길 거부했다. 나르엄마 밑에서 오랜 세월 가스라이팅 당한 나의 뇌는 고장 나 있었다. 엄마가 내 뇌에 닦아놓은 가르마는 자꾸 현재의 행복은 거짓이고 그저 순간이므로 더 불안해져야 한다고 명령했다.
난 아이를 키우며 계속해서 내 뇌의 가르마를 정상에 가깝게 수정해 나갔다. 정상에 가깝다는 건 상황을 상황 그 자체로만 소화해 내는 것이다. 무엇이든 부정적인 결말로 치닫게 가르마가 타있던 내 뇌는 아주 오랜 연습과 시행착오 후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해갔다.
이 모든 과정의 시작은 아이를 정상적으로 키우기 위해선 현재의 이런 뇌 환경으로는 절대 안 된다는 자각으로 부터였다. 나는 내 뇌가 그렇게 가르마가 타있다는걸 알아차리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따라가다 나의 엄마가 나르시시스트 엄마라는 결론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환호했다. 인생전반에 걸쳐 풀리지 않았던 문제의 원인을 드디어 찾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 후로도 엄마가 정말 나르시시스트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백번도 더했지만 말이다.
만약 내가 아이를 낳아 키우지 않았다면 , 나는 아직도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피해자'신세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도 오래 걸리고 매번 실패하는, 이 쓰레기 똥통 속에서 뒹구는 것 같은 과정은 자식이라는 이유 말고는 그렇게까지 절실할 필요성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나는 자식이라는 그절실함 덕에 '피해자'가 아닌 '치유자'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아들은 나에게 선물 같은 존재다. 많이 부족한 내게 와 준 귀한 선물이자, 곧 떠날 손님이다. 아들은 내가 실패해 좌절한 순간에도 <"나는 당신을 믿어요. 엄마">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주었다. 내게 평생을 거쳐 한번은 꼭 경험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수용' 내가 성공하던, 실패하던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그 경험 말이다.
나는 돌아보면 매일 실패하고 매일 사과하는 무식하고 멍청한 엄마였지만, 아들은 그런 나라도 목숨처럼 필요로 했다. 그리고 사과를 하면 늘 고맙게도 받아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나르시시스트 엄마로부터 닮은 부분이 꽤 있었고 그로 인해 아들에게 내 상처를 대물림한 부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인식하던 인식하지 못하던 나는 그 부분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엄마의 딸이므로 나는 엄마를 닮았다. 물론 이것이 대물림이라는 걸 깨달을 땐 진심으로 사과했고 계속 노력했다. 이런 못난 내 모습도 내 아들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수용해주고 있다. 그리고 내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 둘에게 수용받은 후 그제야 나는 나를 제대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 마법 같은 일들이 펼쳐졌다. 내가 나를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나를 먼저 수용해 줬어야 했는데 나는 늘 내가 싫고 미웠다. 나는 가족들에게 내 솔직한 못난 모습까지 수용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정신과 의사도 아니고, 심리상담사도 아니기에 전문적인 치료과정은 잘 모른다. 하지만 이 서툰고백 같은 글은 내가 겪은 것들이고 혹시 그때의 나와 닮은 누군가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위로와 응원이 되어주지 않을까?
왜냐하면 나르시시스트 엄마 밑에 자란 나는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너무도 외로웠기 때문이다. 꼭 혼자 싸우는 느낌이라고 할까? 누구와도 내가 겪은 아픔들과 내 솔직한 고민들을 나눌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아주 비정상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이런걸 공유했을때 듣게될 타인의 비난이 두려웠다. 이제와 돌아보면 나는 비정상보다는 아픈 환자에 가까웠다. 우리는 환자에게 왜 아프냐고 비난을 하진 않지 않는가? 우리는 환자의 환부를 들여다보고 약을 바르고 상태를 체크하며 아물 때까지 기다려준다. 그리고 흉이 지지 않게 조치를 취한다.
나는 어쩌면 나르시시스트엄마의 딸로 태어나 내가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그런 이해나 응원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나는 늘 아팠는데 아프다고 비명을 지를 수도 없는 환자였기 때문이다. 내 아픔을 숨기느라 모든 에너지를 빼앗기곤 정작 아이에게 쏟을 에너지가 바닥나 죄책감을 느꼈던 미숙하고 젊은 엄마였기 때문이다. 상처를 직면하는 게 너무도 힘들었던 젊은 엄마인 나를 50살인 나는 애도한다.
"애썼어, 아무도 몰라도 나는 안다. 네가 얼마나 아들을 사랑했는지, 그리고 애썼는지.. 수고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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