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죽여 지켜본 10년의 약속
2025년 8월 15일, 옛 안동역에 500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유튜버 등 개인 방송을 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경찰과 소방관도 수십여 명 자리를 지켰다. 이젠 열차가 다니지 않는 폐역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날로부터 10년 전 안동역에서 기차여행 중이던 대학생 2명과 방송 PD는 약속한다. “10년 후 이 자리에서 만나자”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 도장까지 찍는다.
기차로 전국을 여행하다 안동역에서 마침표를 찍던 두 대학생에게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10년 후 같은 코스로 다시 떠나자며 만나기로 다짐하고, 카메라에 담고 있던 PD도 같이 재회하기로 한다. 이들 이야기는 당시 방송 프로그램 ‘다큐 3일’에 그대로 나왔다.
2022년 다큐 3일은 종영되었고, 담당 이지원 PD도 자리를 옮겼다. 대학생이었던 김유리, 안혜연 씨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KBS는 특별판을 편성한다. 어찌 될지 몰라도 안동역을 찾아가는 72시간 동안의 여정을 보여주기로 했다.
SNS와 커뮤니티에서 ‘10년의 약속’은 화제를 모았다. 이지원 PD가 방송화면과 함께 올린 ‘가요? 말아요?’ SNS 게시물은 수백만 회 조회되었다. 팔로워수는 한때 100만 명을 넘었다. 언론매체에도 기사가 이어졌다. 약속의 성사 여부에 이목이 쏠렸다. 누리꾼들은 재회를 응원했다.
기업도 발 빠르게 나섰다. 대학생 소녀들이 들고 있던 가방과 과자 기업, 코레일유통에서도 후원을 약속했다. 약속일 한 달 전부터는 기사도 수백여 건이 올라왔다.
과열된 관심에 특별편을 만드는 제작진에서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지나친 대중의 주목에 당사자가 강요로 느낄까 염려했다. 신중한 입장을 내놓았다. “만남 성사 자체는 개인의 순수한 선택이라고...”
그렇게 2025년 8월 15일이 찾아왔다. 청춘의 낭만이 인연으로 찾아오나 궁금한 찰나에 스포일러 기사가 올라왔다. 만남이 무산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안동역 광장에 폭발물을 터트리겠다는 글이 당일 7시 37분에 게재됐다. 만나기로 한 시간 10분을 앞둔 시점이었다. 경찰은 인근 파출소와 경찰특공대 등을 급파해 현장을 수색했다. 역의 진입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 역 광장은 텅 비게 되었다.
재회 불발 소식이 수없이 이어졌다. “산통 깬 폭발물 소동”, “낭만이 박살 난 사연”, “폭발물 작성자 추적 중”, “낭만 망친 폭발물” 등등 기사와 SNS에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일주일이 지난 22일 밤 10시 약속의 결말을 담은 '다큐멘터리 3일 특별판, 어바웃타임'이 방영됐다. 폭발 위험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지켜졌다.
정확한 시간에 대학생 중 한 명이었던 김유리 씨가 나타났다. 본인 요청으로 화면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인사와 함께 휴대전화에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 PD는 "잘 살았냐"는 인사와 함께 "잘 살아줘서 기뻐요"라는 말을 나눴다고 전한다.
다른 한 명 안혜연 씨는 "해외에서 생활하며 일로 바빠 한국에 나가지 못했다. 그때 소중한 기억은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어요"라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연히 남긴 세 사람의 약속에 대중은 마음을 울렸다.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바뀌는 10년 속에 그대로이길 바라는 약속을 따뜻하게 지켜봤다. 모두 낭만을 그리워했다.
<뒷이야기>
홍보실 직원 사이에서는 옛 안동역이 아니라 새로운 안동역으로 가서 만남이 무산되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촬영 당시에 ‘여기서 보자’고 말한 안동역 운흥동 역사는 2020년 폐지되고, 송현동 신 역사로 이전되었다. 이 PD가 ‘여기서 보자’를 ‘안동역에서 보자’고 되받아쳐 혼동될까 염려했다.
감성보다 이성이 앞선 기자들은 10년 전과 후의 ‘내일로 여행객’의 숫자와 추이, 변천사를 물어왔다. 당시 주인공 대학생들은 내일로 티켓을 구매한 여행객이었다. 20대 청년을 위한 내일로 티켓은 기간 한정 무제한 열차 이용 패스였다. 2015년 그들은 패스 기한을 하루 앞두고 여행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SNS가 있어 약속을 기억할 수 있었다. 김유리 씨가 “진공 포장된 제 스물한 살이 여기에 있네요. 3년 후 안동역에서 뵈어요”라는 댓글이 달려 커뮤니티에 이슈가 되었다. 이지원 PD도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동해안 지역 산불로 안동역 근처를 지나면서 그때를 회상했고, 약속 한 달 전에 다시 SNS에 이를 올렸다.
특별편 성우는 가수 유열이 맡았다. 과거에도 '다큐 3일'에서 자주 내레이션을 했던 유열은 지병으로 방송 활동을 중단했으나 8년 여 간의 투병 끝에 목소리를 되찾고 참여했다.
코로나19로 종영된 다큐 3일에서 철도는 단골 소재였다. KTX차량을 정비하는 고양 KTX기지(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에서 펼쳐지는 3일간의 작업이 2014년 방송되었다. 2016년에는 주민이 손수 지은 간이역 양원역이 소개되기도 했다.